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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축도 유감

정발드 2018. 6. 27. 18:57

 축도 유감 


 한성수 / 뉴욕 겨자씨교회 담임목사




축도(祝禱: Benediction)가 뭔가? 미국 연합감리교회(United Methodist Church) 뉴욕연회 감독으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고 일선 목회에 나선 세월이 이러구러 10년인데, 여태 축도가 뭐냐고 묻고 나선다면 이게 뭔가 심상치 않은 조짐이 아니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정말 "여태 뭘 했수?" 하고 누군가가 비아냥거리기만 해봐라, 그런 거룩하고 잘난 사람에게는 내가 알고 있는 근사한 축도를 밤새워 보내고도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고 할 작정이니까. 안팎으로 까뒤집고 살펴보아도 진득한 맛이라곤 당최 없는 사람됨 탓인가. 나는 매 주일 예배가 끝날 때 올리는 그 축도라는 것을 할 때마다, 지난 10년 동안 해온 그 일이건만 지금도 이상스럽게 매우 긴장을 한다. 한국교회에만 흔히 있는 이른바 "회중 대표의 기도"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가끔 경망스런 교인들이 목사 기죽이느라고 하는 말, "하이고, 오늘 예배에는 장로님 기도에서 은혜 받았네..." 그 청산리 벽계수 같은 기도의 흐름, 어쩌면 고렇게 성경 말씀까지도 신약 구약을 잘도 섞어서 똑 따내듯이 인용하여 가면서, 게다가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y) 찜쩌먹을 그 은근히 떨리며 저 깊숙이 파고드는 음성, 그런 기도를 들으면서 벌써 한 많은 인생이 아슴아슴 녹아 내려가는 위안감...그러니, 목사가 여간한 말재간이 없는 한, 무슨 재주로 소나무 뿌리 부여잡고 밤새워 삼각산 산자락을 뒤흔들었던 산기도나, 혹은 토굴 속에 담뇨때기 뒤집어쓰고 눈물로 애원하였던, 그래, 저 가련한 기억 속에서 체득했노라고 자랑하던 기돗줄도, 이른바 평신도들 중에 진솔하게 기도 잘하는 사람 앞에서, 솔직히 더는 효과가 별로 없게 되었을 때, 할 말이 무엇인가? "아, 기도가 말 재주로 되는 거여? 기도는 영롱해야 되지, 입술만 밴지르르하면 뭘해?" 뭐 그렇게 구차한 말 둘러대기 하지 말고, 만천하 목사님들이여 들으시라, 여기 특효약이 있습네다. "다 좋지, 다 좋아, 그러나, 목사에게는 축도권이 있다구..."
언젠가 뉴욕 훌러싱에 있는 큰 교회에서 부흥회를 한다고 광고가 대문짝 만하게 났는데, 강사님이 지금은 한국에서 그분 이름 모르면서 교회에 다닌다면 의심받을 K 목사님, 워낙 훤출하게 잘생기시고 (난 사실 그렇게 잘 생긴 목사만 보면 은근히 부럽더라) 목소리에 벌써 신령끼가 넘치시고, 웃음은 너그러우시고 노여운 표정은 근엄하시고, 게다가 설교하시는 말씀은 또 얼마나 권위가 있으신지, 말씀마다 주옥이요 보검이라 심령을 뒤흔들어 쪼개고, 눈시울도 어느결에 스물스물 부풀어오르게 하시니, 진실로 당대의 설교자요 존경받아 마땅하실 목회자이시라, 저쯤 되시니, 단 몇십 명으로 시작한 교회가 지금은 한국에서도 서울, 서울에서도 강남에, 동양 최대의 건물을 자랑하는 대 교회로 성장했고, 그러니, 그 교회 장로님이 대통령이 되셨다지 않던가? 하, 크신 종님(?)은 역시 뭔가 다른 데가 계시는 게야. 솔직히 나는 그때 그 K 목사님에게 많이 반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어른을 모조리는 아닐지라도 많은 점에서 존경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 무슨 말씀들을 하셨는지는 세월도 한참 되었고, 내 본시 하리망탕한 머리를 가진 탓에, 오직 한 말씀만 기억 속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그래봤자 뭐합니까? 목사에게만 축도권이 있단 말입니다." 아, 그 도도함, 아, 그 권위, 그래 사실 목사가 뭐 별난 게 있다고, 감히 목회를 한다고 설쳐, 대체로, 지난 세월에 못된 짓 많이 하고, 예수 믿어 새 사람되어 이제 그 입은 은혜에 감복하다 못해 복음에 빚진 자되어(바울처럼?), 세상 영화 다 버리고(목사 안되었으면 세상 권력과 재물과 온갖 영화 다 누렸을 텐데?) 이렇게 말씀 증거하러 다닌다는 사람들, 죽을 병 걸려 백약이 무효요 화타와 편작이 열이라도 못 고칠 질병에서, 예수 믿고 죽을 목숨 살아나 하느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심에 너무 감격하여, 지옥갈 백성들 천국으로 인도하기로 맘먹고 나선 이들, 동기들이야 다 감격스럽고 그 갸륵한 마음씨에 눈물겨울 지경이지만, 솔직히 그래 하느님 사랑 한번 안 입어본 사람이 어디 있으랴고, 자기들만 별종인 양 내세울 경험이 그토록 구별된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권위로 특별한 체하는 거요? 홀연히 깨달아지는 말씀, 그래 목사는 "축도권이 있다" 이거야.
이른바 말씀에 능력이 있어 사람을 감동시키고, 죄악에서 구원으로 인도하는 복음선포의 증언자, 설교 잘해서 목사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요새는 성경도 워낙 좋은 주해성경이 히브리어 희랍어 설명까지 넣어 웬만큼 눈이 따진 평신도 앞에서는 옛날에 성경 지식 자랑하던 목사가 더는 울거 먹을 실력 자랑도 시들하고... 그런데, 목사는 평신도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축도권"이 있다니, 그거야말로 불가침의 영역이지... 설교라는 것도 이젠 그놈의 카세트 테이프인가 뭔가 하는 것 때문에, 아니, 기독교 방송에서 날이면 날마다 읊어대고 틀어대는 명설교자들의 명설교들 때문에, 개체교회 목사가 우물안 개구리식 설교로 목줄에 힘깨나 쓰던 시대는 어느결에 지나갔다. 게다가 기독교 서점에 가보면 웬놈의 설교집이 그렇게 쏟아져 나오는지, 나 같은 땡초 목사도 더러는 설교집 좀 내보라고 권하는 소리도 들어봤는데, 그 때는 은근히 '내가 설교를 꽤 잘하나보다' 하고 참 민망스러운 오해도 해보았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나는 남의 설교집이나 설교 녹음 테이프를 꽤 열심히 읽고 듣는 목사 중에 하나라고 자부한다. 내 성격상 남의 것을 홀랑 베끼는 짓이야 할 수 없음을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증언해 줄 것이지만, 그래도 남들은 어떻게 뭐라고 설교들을 하나 영 궁금해서, 남의 설교집이나 녹음 테이프를 읽고 듣고 난 후에 땅 바닥에 수도 없이 패대기를 치면서도, 오늘도 그 버릇은 못 고치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그 많은 설교집을 내놓으시는 목사님들이 대체로 한 가지 공통적인 병에 걸려 있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자기가 아주 설교를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착각증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자기는 하느님 말씀을 정말로 정직하게 선포한다는 망상병" 말이다. 물론 개중에는 과연 눈이 번쩍 떠지는 참 훌륭한 설교집도 있어서, 문득 그 목사님을 직접 한번 뵙고 싶어지는 분도 아주 없는 바는 아니다. (참고로, 지금까지 그런 설교집 한 5권쯤 읽었다고 기억된다. 혹시 설교집 내신 목사님들 중에 이 글을 읽는 분이 계신다면, 바라옵건대 당신이 바로 그런 목사님이라고 믿어주시기를...) 그러나 한편, 노아의 홍수가 온 땅위의 생명을 죽이는 물결이었듯이, 요즈음에는 설교의 홍수가 오히려 사람을 숨길 답답하게 만드는 세상이 된 기분이 든다. 말, 말, 말, 어디를 가나 말들이 넘쳐난다. 마치 서울 거리의 자동차들처럼... 그러니 바라건대는, 노아의 방주를 오늘에 다시 짓는다면, 방수처리가 아닌 방음처리를 해야할 것 같다. 예수님은 당신을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명의 샘물로 치유하셨는데, 공해시대에는 마실 물조차 온갖 찌꺼기들로 넘쳐 나서 등산객들의 갈증도 이제는 산에서 흐르는 약수가 아닌 집에서 담아온 수돗물로 달래야할 판이란다. (지금 이 글을 컴퓨터에 찍어 넣고 있는 내 모습도 한심스럽기는 마찬가지고... 아! 말 좀 덜하고 살 길은 없나? 그렇지만 또한 이렇게라도 소리 질러보지 않으면, 그나마 속이 터질 지경이라, 객설이라도 늘어놓는 이 못난 인생을 독자여 부디 용서하시라.) 그러나, 목사라는 직업이 주로 입을 가지고 사는 터라, 심지어는 축도까지도 흔히 한국교회에서 많이 보듯이 손을 쳐드는 동작만 빼면, 이 또한 입으로 하는 말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나는 바로 이 축도 때문에 여러 차례 시련을 겪은 경험이 있다. 1985년에 나이 40이 넘은 불혹의 중년이 되어서야 이른바 목사 안수를 받고, 뒤늦게 목회 현장에 파송(Appointment) 받은 남보다 일찍 흰 머리가 뒤덮인 중늙은이 모습과는 달리, 처음부터 사방에서 딱한 눈으로 바라보는 표적이 될 철없는 행동을 끊임없이 저질렀다. 우선, 그 한문 투성이의 개역 성경을 집어치우고, 공동번역 성경을 사용하였다. (좀 토를 단다면, 나는 어려서 한문을 한 3년, 그것도 유명한 한문 스승 밑에서 남보다 특출나게 종아리 맞는 것으로 이골이 난 경험이 있어서, 한문이라면 별로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자부한다. 허어...그렇구만.) 한국도 아닌, 미국에서 이민으로 사는 현장에서, 커가는 아이들에게 무슨 재주로 그 어려운 개역성경의 한문 투성이 문장을 이해시킬 수 있겠는가? 더구나,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이래 처음(천주교 200년, 개신교 100년 역사상)으로 신구교 양쪽에서 대표를 내어 공동으로 번역한 성경이니, 다소 문체에 문제가 없는 바는 아니지만 (아, 그렇지만 구약 부분은 참 멋지게 번역되었다. 거, 누가 번역하셨는지...), 에큐메니칼 정신이 먼저 할 일은 성경의 통일이라고 나름대로 고집을 부린 것이다. 예배 중에 돌리는 헌금 바구니를 없애고, 예배실에 들어오면서 바로 각자가 헌금을 미리 하는 헌금상자를 설치하였다. 목사 설교가 좋으면 오른쪽 호주머니의 20불짜리를 꺼내고, 목사 설교가 신통치 않으면 왼쪽 호주머니의 5불짜리 지폐를 꺼낸다는 속설도 무시할 겸, (만날 5불짜리만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고), 더구나 남의 눈치 보면서 무슨 못할 짓이라도 하는 양 소매치기도 아닌데 공연히 자연스럽지 못해하는 교인들의 야릇한 표정도 없앨 겸, 집을 나설 때 미리 그날 헌금할 돈을 준비하게 하는 성과도 노려서, 재정위원장의 비난에 가까운 반대를 묵살하고 헌금상자를 만들어다 놓았다. 되돌아보면, 못난 독사 하나 만나서 마음 고생들 많이 했던 옛날 교인들에게 미안한 생각도 들긴 하지만, 대체로 돈도 있고 지식도 있고 사회적 신분도 내세우는 불과 몇 명 안되는 사람들에게는 두통꺼리 목사요, 쫓겨나기 십상인 짓을 잘도 저질렀다. 그러다가 잦은 방귀 끝에 뭐 터져 나오듯이 맨 나중에 걸려든 것이 바로 나의 축도(Benediction)였다.
나는 축도를 할 때, 양손이든 한 손이든, 손을 쳐들지 않고 축도를 할 때가 더 많다. 내 생각은 아주 간단하다. 축도는 그 축도를 하는 사람의 마음, 그 말이 중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손을 쳐드는 종교 상징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어서, 혹 두 손을 펴들고 축도를 할 때는, 어지러운 세상으로 흩어져 나가는 교인들을 마치 감싸 안기라고 하는 기분으로 둥그스름하게 팔을 휘어서 예배당 안 이쪽 저쪽을 두루 살피면서 축도를 한다. 그럴 때는 교인들보고, 눈을 감고 머리를 숙이지 말고, 오히려 축도하는 내 손을 내 얼굴을 쳐다보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물론 얼굴이야 별로 내세울 것도 없는, 백발에 납짝 코에 도끼 눈을 박아 붙인, 대체로 스스로 불만인 모양이지만, 그래도 축도를 할 때 사람들이 쳐다보면 상당히 엄숙하거나 때로는 자애로운 표정을 짓느라고 온갖 정성을 다 기울이는 것이다. 이런 걸 어릿광대라고 한다던가? 한 손을 쳐들고 축도를 하는 버릇은 버린 지 오래다. 한 20년 전에 당시 인기가 대단하셨던 모 목사님(지금은 모 신학대학 교수)이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서 아주 멋있게 오른손 하나만 처억 들고 축도를 하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어서 나도 목사가 된 후 처음에는 그 모양을 흉내내기라도 하는 양, 한 손 들고 축도를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 오만한 한 손은 꼭 히틀러(Adolf Hitler) 통치하의 독일 사람들 인사거나, 좀 높다는 사람들이 공연히 한 손 펴들고 사람들 앞에서 목에 힘주는 모양을 연상시켜서, 어느 결에 싫어지고 말았다. 지금은 대체로 한 손이든 양손이든 손을 쳐들지 않고 축도를 한다. 간혹 손을 사용하고 싶을 때는, 그 대신 두 손을 마주 잡고 합장하듯이 축도를 한다. 누가 나를 보고 스님을 닮아 불교식 합장이냐고 반문한다면, 그렇지는 않다고 대답하겠지만, 또 동시에 왜 불교식 합장이면 뭐가 안되냐고 따지고 들 셈이다. 왜 축도에서 손을 쳐드는 것에 이토록 신경질적인 조심을 하느냐고 묻는 이에게 나는 다음 실화를 들려주고 싶다.
꽤 오래 전, 뉴욕 한인교회 협의회에서 연중 가장 큰 행사로 해마다 7월 초 독립기념일 전후로 벌이는 "할렐루야 전도 대회"에 한국의 강남에 있는 K 모 목사님이 주강사로 초빙되었었다. 그 어른이 지금은 교단의 감독회장이라는 자리에 숱한 화제를 뿌린 끝에 당선이 되셨지만, 그 당시에도 대 교회 목회자들만 주로 초빙되는 영광(?)을 그 분이 받아, 연 4일 밤 수 천명이 모인 청중 앞에서 회심의 설교를 하게 되었다. 당시 신학생이었던 나는 90마일 떨어진 뉴헤이븐(New Haven)에서 자동차를 2시간 몰고 내려와 그 굉장한 열기에 싸여, 장차 목회자가 될 준비를 하고 있던 과정에서 뭣 좀 배울 것을 기대하면서, 유학생의 고단한 삶 속에서도 열심히 시간을 내어 그 전도 대회에 참석하였던 터이다. 그 때 나는 K 목사님으로부터, 목사의 축도가 이른바 평신도들을 억압하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음을 깨달았고, 앞에서 말했던 다른 K 목사님으로부터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수천 명 모인 청중을 앞에 두고 이른바 대형 교회 목사들이 하는 설교는 대체로 비슷하기에 "혹시나 했다가 역시나"로 끝나도 크게 탓할 것도 없다. 다들 그러니까. 그러나 나는 그 K 목사님이 들려준 한 가지 예화를 잊지 못한다. 자기가 공군 군목으로 있었을 때,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도 자기가 축도를 하고자 손을 쳐들었더니 곧 고개를 숙이는데,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어느 장군이 고개를 숙이지 않기에, 손을 든 채로 박정희 대통령을 눈짓하면서 쏘아보았더니 그만 별자리도 고개를 푹 숙이고 말더라면서, "지가 안 숙이고 배겨?" 하고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목사의 축도하는 손은 대통령의 고개도 숙이게 만든다는 대단한 위력을 과시하는 것이 기독교인들 앞에서는 목사의 손이 아니라 하느님의 복주심 앞에 겸손한 자세로 설명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을 자랑삼아 내세우는 태도는 좀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여우가 호랑이 가죽 쓰고 위세를 부리는 것(狐假虎威)"과 무엇이 다른가? 하늘을 날던 새도 날개를 접고 떨어질 위세의 박정희 대통령도 하느님 앞에서는 한갓 죄인에 불과하니까 (실제로 훗날 박대통령의 장례식에서 그런 표현을 한 사람은 천주교의 김수환 추기경 한 분뿐이었지만), k 목사님의 손이 축도를 하고자 높이 치켜 들렸을 때 당연히 고개를 숙이고 그 축도의 강복(降福)을 받도록 겸손해지면 좋은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고개를 숙이지 않는 장군의 목을 꺾었다고 기세 좋게 예화를 드는 k 목사님의 속셈은 영판 다른 데 있다고 느껴졌다. 지나친 오만은 열등감의 소치이듯이, 아무것도 으스댈 것이 없으면 그렇게라도 해야 속이 좀 풀리는 기분은 이해가 가지만, 이것은 축도에 대한 이해를 오도할 우려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축도하기 위해서 높이 쳐든 목사의 손은 평신도들 머리를 짓누르기 위한 제스추어와 연상시켜서, 목사와 평신도 사이를 차별하는 억압의 징표로 사용될 위험이 있다. 만일 축도할 때 두 손을 쳐드는 것이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면, 가령 레위기 9자 22절(제사장 아론의 축도)이나, 누가복음 24장 50절(예수님의 승천 직전 제자들을 위한 축도)에서 보듯이, 그 손이 사람의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게 만드는 억압의 제스추어는 결코 아니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이제 막 승천하실 예수님의 마지막 축도의 모습을 눈감고 작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누군가가 눈뜨고 보아 두었으니까 예수님께서 양손(희랍어에서는 손들-케이라스-이라고 복수를 썼으니)을 쳐드셨다고 후일 복음서 기록을 위해 증언하지 않았겠는가? (성서 축자영감설 믿는 분은 이제 이 글 그만 읽으시기를...) 구약시대에 유태인들이 기도하던 모습은, 알려진 대로 두 손을 하늘을 향하여 들고, 또 두 눈을 분명히 크게 뜨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소리쳐 기도하였던 것이다. 그러자면 자연히 손바닥이 서로 마주보게 하늘을 향하여 펴졌지, 결코 사람 머리를 손바닥으로 찍어누르거나, 백보를 양보하여 사람들 머리 위에 덮어 씌워 무슨 성령의 단비라도 뿌리는 기세로 손바닥이 땅을 향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천주교회나 성공회나 루터란 교회의 모든 전례 의식서에서 두 손을 들어올리는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 하여 주시기를 (임마누엘)"(The Lord be with you!) 하는 기원의 표시이고, 이윽고 회중들이 "목사님(신부님)에게도 함께 하여 주시기를"(And also be with you)하고 응답할 때는 신부(목사)는 자기의 두 손을 자기 가슴 위에 모아 합장하는 것이 전형적 방법이다. 목사가 축도를 할 때면 모든 평신도들은 꼭 고개를 숙이고 (마치 옛날 상감 앞에 설설 기던 옛날 조종 대신들처럼) 눈조차 감고, 꼭 그렇게 해야할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고개 숙이고 눈감지 않으면 내려오던 하늘의 복이 어디 다른 데로 새기라도 하는가? 목사의 손바닥이 무슨 중국의 쿵후 마스터가 장풍(掌風)을 내듯이 성령의 바람을 불어내는 기구라도 된단 말인가? 더러는 손바람을 일으켜서 평신도들을 땅바닥에 쓰러뜨리는 기묘한 기술을 자랑하는 영력이 충만하다는 목사들도 있는 줄 알지만, 목사가 축도할 때 교인들이 스스로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하느님 앞에 겸손히 임하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보기에도 좋고 아름답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목사의 축도가 유효하게 되는 조건은 아니다. 내가 본 어떤 미국 교회 여자 목사는 축도를 할 때면 언제나 사람들을 웃음으로 권면하면서, 교인들(숫자가 적어서 가능하기는 하겠지만)을 일일이 눈 맞추고 부드럽게 말을 하면서 축도를 하여 보내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손을 쳐들고 안쳐들고가 문제가 아니고, 손을 쳐들면서 이 행동 속에 목사의 권위가 담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목사는 축도권이 있다"고 주장하게 한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있다. 축도라는 것이 오직 목사에게만 허용되는 특권이라고 주장은 하면서도, 어떤 대중 집회에서 순서중 맨 나중에 나오는 축도는 대체로 연장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처음에는 아마도 그토록 중요한 축도이니만큼, 축도야말로 그 중 가장 존경받는 선배 목사님 차지로 미리부터 점찍어 놓았던 것이었으리라. 축도야말로 가장 간단히 끝낼 수 있는, 또 가장 간단히 끝내어 주기를 기대하면서 맡겨지는 모양인데,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말이 많아지게 마련이고 서운한 마음도 겹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날 보고 간단히 마감해 달라고 체면상 부탁하는 모양인데, 그렇게는 아니될걸. 이왕 올라 왔으니 나도 할 말 좀하고 내려가리라..." 하고 심지어는 아예 길고도 지루한 축도 아닌, 마음 다져 먹은 긴 설교를 앞에다 덧붙이고, 끝으로 마지 못해 두 손을 들고 비로소 예수의 은혜와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을 축원하는, 얼굴에 두꺼운 가죽 쓰시는 참으로 못 말릴 목사님들도 좀 많으신가? 그런 분들이 어떻게 자기 교회에서 평신도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교육하는지 궁금하다. 누가 말하기를 주일 예배에서 두 번씩 설교를 듣자니 죽을 맛이라고. 눈뜨고 듣는 설교(목사님 설교)는 그래도 미리 준비한 것이라서 좀 낫지만, 눈감고 듣는 설교(장로님 기도)는 창세기에서 요한 계시록까지 꿰뚫어 성경귀절을 인용해 가면서 엮어대는데. 참다 못해서 예배실 밖으로 나왔더니, 어떤 사람이 먼저 나와 있다가 하는 말이 "어이, 지금 어디쯤 왔어?" "응, 이제 엘리야야" "난 여호수아 때 미리 나와 버렸어" 하고 주고받더라던가? 설사 그 지경까지는 안 갔어도, 축도를 부탁 받으면 "허, 이젠 나도 축도목사로 전락하고 마는구나..." 고작 늙은이 대접으로 맨 끝에 치장 삼아 한 자리 내어주는 주최측에 항의할 수도 없고, 그래도 좀 눈치가 빠른 분들은 축도 하나는 깨끗 산뜻하게 짧게 잘 끝내 주기는 하지만, 속으로는 "야, 부탁하려면 설교를 부탁하지 웬 축도는 부탁하느라고..." 하고 속으로 뇌까리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서글퍼하시는 분은 또 안 계실건가? 사정이 이러하니, 축도하는 사람에게는 축도하는 일이 오히려 저주와 같은 기분이 안 들겠는가? (너무 심했나?)
한국 교회에서는 전도사가 멋모르고 축도를 했다가 호되게 당하는 일도 있었음을 들은 바 있다. 나도 전도사 시절에 목사가 손을 터억 쳐들고 축도를 하는 것을 얼마나 부러워했던지, (지금 생각하면 어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 들거니와), "나는 언제나 저렇게 축도를 해보나" 하고 서운해도 참고, 흔히 남들이 하는 대로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한 일이 생각난다. 교인들도 전도사의 축도 아닌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치고 교회당 문을 나서는 것이, 뭔가 소중한 은혜를(여기 은혜란 말은 잘못 사용되고 있지만) 못 받고 나선다고 느끼게 하는 그 일이 못내 아쉽고 허전해서, 언제나 우리도 목사님의 은혜스러운 축도를 받아보나 하고 마음 허전하게 만드는, 그 축도는 어서 바삐 개정하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축도권"은 꼭 목사에게만 허락되어야 한다는 옛 시대의 관행은 개혁되어야 한다. 축도(祝禱)는 "받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라야 한다. 축도도 기도다. 어떤 사람이 기도하는가보다, 어떤 마음으로 기도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물론 누군가가 자기를 위하여 기도를 해준다는 것은, 그 기도의 내용을 넘어서서, 그 사람과의 관계를 하느님 앞에서 이루는 깊은 효용이 있는 것은 별도의 얘기이다. (젊은 날 연애하는 사이에서 연인이 자기를 위해 기도해 주고 있다는 생각만 해도 그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가?)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따라 정성껏 올리는 기도(이런 기도가 야고보서 5:13, 16의 "믿음의 기도, 의인의 기도"인데)는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예컨대 성직자들)이 아닌 보통 사람들(보통 사람이라고 강조하고 대통령 되려는 그런 욕심 말고)이 했다고 해서 하느님 앞에 상달되지 않을 리가 없다. 왜 보통 사람은 마태복음 6장에 있는 주기도문(The Lord's Prayer)으로 하면 괜찮고,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 있는 이른바 바울의 삼위일체 축도를 하면 안된다는 말인가? 나는 주기도문으로 모임을 끝내는 관행에 대해서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태 6:9)" 하고 시작되는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문(The Lord's Prayer)은 기도의 모범되는 정신을 집약한 것이지, 무슨 모임을 끝내는 축도대용 기도문으로 사용하기에는, 예수님의 마음을 오해하는 일이라고 느껴진다. 오히려 주기도문은 우리들이 기도를 드리기 전에 한번 기억해보고, 우리들의 기도가 중언 부언 제 욕심을 빨랫줄 늘이듯이 헛길로 나가지 않도록, 기도하는 마음을 바로 짚어 가르치신 예수님의 마음을 명심하는 징표로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국 교회에서만 있는 일은 아니지만, 기독교회가 목사를 성직자로 구별하는 일을 시작한 이래, 흔히 설교와 성례(세례, 성찬식)와 축도만은 원로 장로님 아니라 수석 장로님이라도 못하게 해온 것은, 나름대로 이해는 간다. "아, 누구나 다하겠다고 덤비면, 목사는 그럼 뭐여? 기름부음 받은 종님(?: 종이 님으로 불리우는 게 얼마나 재미있나)이 평신도와 뭐든지 다 똑같으면, 누가 목사질 할라고 하겠나..." 교회라는 기관이 생기고 조직화되면서 자연 직제가 점점 화석화되어 가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직제가 평신도(나는 이 용어도 영 마음에 들지 않지만, 우선 사용한다)를 우습게 만드는 그런 방향으로 발전되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할 짓은 분명코 아니라고 확신한다.
한국 교회에서는 "축도"하면 거의가 다 고린도후서 13:13의 이른바 바울의 삼위일체 축도로 널리 알려져 왔다. 혹시 지나친 말인지 모르겠으나, 고린도후서 13:13의 기도문만이 축도전문용 기도문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교인들이나, 심지어 목사님도 계시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이제 모임을 끝내고 떠나는 사람들(바울의 경우엔 편지를 끝내면서)을 향하여 간절히 빌어주는 기도(祝:빌 축, 禱:빌 도)의 내용은 뚯밖에도 간결하기 이를 데 없다. 딱 3가지를 빌어주는데, 첫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둘째는 하느님의 사랑, 셋째는 성령의 교통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여기 이 순서(예수, 하느님, 성령) 때문에 혼동을 일으켜 하느님(성부), 예수(성자), 성령의 순서로 축도했다가, 목사가 그 정도로 신학적인 기본이 안되어 있다고 어느 부흥사가 후려패는 예화를 들은 적도 있다. 요컨대, 사람은 예수님의 은혜를 통해서야 비로소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접할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해야 비로소 성령과 교제(교통)할 수 있는 것이니, 이 순서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점진적, 인과적 논리를 펴는 것이 중요하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밥을 먼저 먹고 반찬을 입에 집어넣어야지, 반찬부터 집어먹고 밥을 나중에 집어넣으면 안된다면, 그것 또한 너무 절차만 따지는 까다로움이 돋보이지, 씹어 먹는 사람의 취향도 있음을 너무 일방적으로 정돈하는 느낌도 든다. 오히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목사님들 축도하는 것 자세히 들어보면, 그리스도의 은혜, 하느님의 사랑, 성령의 교통 앞에 각각 찬란한 수사를 덧붙여 듣기 좋게 만드는 것이 보통이고, 특히 얼마나 덧붙이는 말을 근사하게 늘어놓는가로 겨우 축도하는 능력의 차이를 보이고 싶어하는 속셈이야 크게 나무랄 것은 없다고 본다. 문제가 되는 것은 맨 마지막 "성령의 교통(또는 교제: Communion:Koinonia)"이라는 말이 어느결에 "성령의 감화 감동 역사" 하심으로 둔갑을 하고, "교통(교제)"이란 말이 슬그머니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듣기에 따라서는, 별로 신통치도 않은 억지 설교를 해놓고는, 이런 말씀도 그저 하느님 말씀이 되도록 듣는 사람의 가슴 속에 "성령이 감화 감동을 일으키는 역사"를 해야한다고 반 강제적 협박을 하는 교묘한 심리적 수법이 숨어 있는 것 같다. 목사의 설교를 비판적으로 듣는 교인은 (사실, 아예 목사의 설교를 꼬집어 뜯어야겠다고 처음부터 손톱을 세우고 덤비는 사람도 꽤 있긴 하지만), 그 책임이 목사의 신통치 않은 설교 내용 때문이 아니라, 교인의 가슴 속에 악령이 성령대신 자리잡고 있다고 책임 전가를 하려는 숨은 의도가 보인다. 그러니, 성령이 감동 감화 시켜주기를 기도하는 목사의 심정의 간절함이야 이해가 가지만, 그건 설교 직후에나 할 기도이지, 이제 교회당 밖으로 성도들을 파송하면서 할 기도의 내용은 아닌 것이다.
자, 그런데 은혜라니 무슨 은혜인가? 희랍어의 "카리스(Kharis)"란 단어를 영어로는 grace, 한문으로는 恩惠(은혜)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본시 이 말은 희랍어에서는 "유쾌하고 기쁜 것, 매력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 친절하여 호의를 베푸는 것, 감사한 것" 등을 뜻하는 것이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는 한번도 "은혜"라는 말이 쓰인 적이 없고, 공관 복음서 중에는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눅4:22-예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눅1:30-마리아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눅2:40-예수님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 "지혜가 충족하며 하느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눅2:52-예수님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 "하느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요한복음서에서는 오직 요한복음 서론(1:1-18) 중에서 3군데만(1:14, 16, 17) 나온다. 그러나 이 은혜라는 말이 바울에 의하여 복음을 뜻하는 기술적 용어("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변화되면서, 그 출현 빈도 수는 놀랍게 늘어난다. 바울 서신 중에서만 101회(총 156페이지 중), 나머지 신약성경 전부 중 51회(총512페이지 중) 나타나는 비율로 보아, 이 단어(은혜)가 얼마나 바울의 애용을 받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은혜"라는 낱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짝지어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은혜"라는 표현으로 나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표현보다 더 많다. 예수님은 하느님 은혜의 가장 효과적인 전달자(중계자)로 부각된다. 물론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느님의 은혜"가 별도인 것은 아니고, 표현상의 차이이지만 (그래서 "하느님과 주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표현도 곧잘 나온다: 살후1:12, 롬5:15, 고전1:3) 바울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일방적 호의(인간의 행위나 공로와 관계없는)를 뜻하여, 주로 편지 서두의 인사나, 편지 끝에 축복의 인사로(고린도후서13:13이 대표적)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교회에서 사용되는 "은혜"라는 말은 "감동"이라는 말과 혼동되어 오용되고 있지만, 교회 안에서는 거의 일반화되어 별 문제가 없는 듯하다. "목사님 오늘 말씀 제게는 참 깊은 감동을 일으켰습니다"해야 될 말을, "목사님 말씀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해야 더 은혜(?)스러운 것일까? 전통적으로 우리 한국인들이 "은혜"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받은 호의를 도로 갚아 드려야 할 것으로 말할 가령 "부모님 은혜, 스승의 은혜" 등을 말하면서, 사용하여 왔다. 받는 것이라기 보다는 갚아야할 것으로 예컨대, "부모님 사랑을 받았으니, 그 은혜를 어이 다 갚을소냐..."하고 말했지 않았던가? 더구나 회의를 진행 중, 어떤 사람이 좀 까다롭게 굴면, 흔히 하는 말이 "우리 회의를 은혜스럽게 진행합시다"할 때, 여기 은혜는 그저 좋고 좋게, 두리뭉수리로 넘어가되, 목사님 의도대로 적당히 끝내자는 뜻으로 악용되기도 한다. 은혜라는 말이 사슴 가죽에 쓴 "가로 왈" 글자처럼(녹비에 가로 왈: 가로로 잡아당기면 가로 왈(曰), 세로로 잡아당기면 날 일(日), 제멋대로 해석되어, 베풀어주신 사랑도 되고, 가눌길 없는 감동도 되고, 심하면 담넘어 가는 구렁이도 되니, 이거야말로 한국인의 능소능대한 심성이 아니고야 제대로 헤아릴 길이 있으랴... 허긴, 역사상 서양에서도 "은혜(grace: 카리스)"라는 말은 약간씩 다른 뉴앙스를 주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으니, 가령 오리겐(Origen)이나 아타나시우스(Atanasius)같은 희랍교부들은 "계시나 구원받음의 객관적 사실에 의하여 마음 속에 나타나는 주관적 깨달음이나 자유함으로 이루어지는 은혜의 신비적 성격"을 강조하였고, 이에 반하여 터툴리안(Tertullian)같은 라틴 교부들은 "의로움과 영생의 보속을 주는 신적인 에너지로 물질적인 이해에 가까운 작용성"을 강조하여 이해하기도 했으며, 나중에 어거스틴(Augustine)이나 아퀴나스(Aquinas)에 이르러서는 여러 가지 은혜의 종류를 갈라놓기도 했으니, 훗날 마르틴 루터(Luter)나 칼 바르트(Barth)같은 이들이 나타나서 골치 아픈 이 복잡성을 뒤집고, 하느님이 한 분, 예수님이 한 분이시니 은혜면 한 가지 일뿐이라고 일축하기도 했다.
성령의 교통(Traffic이 아니고 Communion이다)이 뭔가? 사도신경에도 끝부분에 가면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The communion of saints : Communio Sanctorum)"이 나오는데, 오해되기 십상인 표현이다. 교통이란 말은 요즈음 한국어에서는 차라리 자동차, 비행기, 선박 등을 이용한 통행을 말하는 것이 보통이니, "성도가 서로 사귐" 정도로 바꾸면 어떨지? "성령의"라는 소유격을 사용하였지만, 해석하기에 따라 좀 이해가 달라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 개역 성경에서는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하였으니, 한국어 문맥대로라면 성령이 주체적으로 교통(교제)을 사람(너희 무리)에게 이루는 사건을 뜻하게 된다. 그러나 희랍어 원문에서는 목적격적 소유격을 사용하고 있어서(Koinonia tou bagiou pneumatos) 오히려 사람이(너희 무리) 성령 안에 참여하는 사귐을 말하고 있다. 마치 한 우물 물을 마시는 시골 동리 사람들이 사귀는 그런 공동체적인 사귐을 의미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고후 13:13의 이른바 삼위일체 축도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은 은혜와 사랑의 주체(주격 소유격: Subjective genitive)임에 반하여, 성령은 교제의 객체(목적적 소유격)로 적용하므로 삼위의 평행이 깨어진다. (그럼 삼위일체가 아니잖아?) 성령을 주고받는 술잔 삼아 나누는 교제가 될 수는 없는 일이나, 여기 목적적 소유격으로 사용할 경우, 사람들이 성령 안에 함께 참여하여 이루어지는 교제를 뜻하는 것이다. 한 우물을 퍼마시나 결국 물이 사람 뱃속에 들어가듯이, 성령도 사람 가운데 분급(Impartation)되어 사람 안에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가능하다. 따라서, "성령의 감동, 감화, 역사, 교통"이라고 섞어 놓으면, 앞의 세 개(감동, 감화, 역사)는 분명코 성령이 주격적 소유격으로 사용되는 것(그렇지 않으면 말이 안되니까)을 뜻하여, 성령이 주체적으로 사람에게 감동, 감화,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고, 끝의 교통은 앞에서 말한 대로 성령 안에 참여하여 교제를 이루는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니, 따라서 이들은 한꺼번에 섞어서 비빔밥처럼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감동, 감화, 교통하심이"라고 두루 섞어서 중국음식 짬뽕식 축도를 해서라도 맛만 있으면 된다고 우기는 사람에게는, 무슨 다른 말이 필요하리요? 세상이 많이 달라지고 발전되어, "꿩 잡는 게 매"라는 명언이 풍미하는 시대가 된 것을 미쳐 몰라본 사람이 면구스럽게 머리나 긁적이고 있을 수밖에...
게다가 축도 하면 고린도후서 13:13 뿐이라고 고집하는 사람보다는 민수기 6:24-26의 저 유명한 아론의 축도를(루터교회에서는 1526년 이래 루터의 고집으로 공식화해 놓았거니와) 가끔이라도 첨가하는 사람이 좀 더 융통성이 있어 보이고, 로마서 15:13 (소망의 하느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얼마나 멋진가?)를 알고 있으면 더 풍성해 보이고, 빌립보서 4:7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특히 성공회에서 성찬식과 연결하여 사용)도 인용해 봄직하며, 나 개인적으로는 자주 히브리서 13:20-21을 사용하는 편이거니와, 유다서 24-25절도 때를 따라 인용해 보면 얼마나 신선하고 감동적일 건가? 더구나, 전례 의식을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은 용감하게 성경 밖에서 다른 사람들의 아름다운 기도문을 인용하거나, 최후로 자기 자신이 미리 정성껏 준비하거나 즉석에서 더듬거리면서라도 온갖 긴장을 넘어가면서 성도들을 향한 눈물겨운 사랑의 마음을 엮어서 축도를 하면, 그 얼마나 갸륵하고 창의적인가? 하느님께서 싫다고 아니하실 것이고, 오히려 가상하다 아니 하시겠는가? 사실 축도야 양손이건 한 손이건 손을 들고 하든, 아니면 손을 합장하고 하든, (그렇다고 뒷짐을 지는 꼴을 칭찬하는 것은 아니고), 아예 손을 사용하지 않든, 또는 앞에서 말한 여러 성경 귀절 중 하나를 인용하든, 아니면 자기 창작으로 올리든, 그게 무슨 그리도 큰 문제랴, 그 마음이 문제이지, 두 손을 들었어도 신심으로 하느님께서 함께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비는 마음으로냐, 아니면 "이 손이 어떤 손인데 어느 놈이 감히 고개를 쳐들어!" 하는 마음으로냐, 그게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나는 손을 들지 않고 축도를 했다고 따지고 드는 어느 평신도에게 나름대로 설명을 했건만, "아, 하라면 하라는대로 하기나 하시오!" (여기 머릿 글자만 엮어보면 '아하하하하'가 되거니와) 하고 냅다 소리를 지르는 그 사람 앞에서, 뭘 모르는 목사로 봉변을 당했다. 더구나 그는 말하기를 "어떤 성도가 눈을 뜨고 보았는지 모르나, 목사님은 손을 들지 않고 축도를 한다는데, 거 사실이요?" 어떤 성도는 무슨 어떤 성도, 바로 자기지... (대개, 남들이 다들 그러더라면서 찾아와서 고자질하듯이 말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장본인이고).
그나저나 축도야말로 그래도 예배 시간에 성도들이 가장 좋아하는 순서가 아닐지? 몸을 비비꼬며 이제나저제나 예배가 끝나기만을 "동백 아가씨"가 님 기다리듯 하다가(헤이일수어업시 수많은 바므을...아, 그 간드러지게 넘어가는 가락: 이게 목사가 쓰는 글이여?), 저 익숙한 고린도후서 13:13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소리가 들리면, 아니, 목사님이 만세 부르듯이 양손을 번쩍 치켜들면, 평신도 중에도 "하이고, 드디어 끝나는 구나" 하고, 정말 해방의 만세 부르고 싶은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 그러니, 복음이 따로 있나, 축도가 복음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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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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