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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훈 센 - 캄보디아 총리 - 여배우 사망 스캔들

정발드 2016. 12. 10. 21:58

훈 센(크메르어: ហ៊ុន សែន, Hun Sen, 1952년 8월 5일 ~ )은 캄보디아의 총리로, 캄보디아 인민당(CPP)의 핵심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자 정부를 1993년 다당제를 회복한 이후로 왕당파와 연합하여 캄보디아를 통치한 실질적인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다.

 

양 력: 1952년 8월 5일

음/평: 1952년 6월 15일 남자

 

시 일 월 년

@ 癸 丁 壬

@ 未 未 辰

 

丙 乙 甲 癸 壬 辛 庚 己 戊 대운: 순행

辰 卯 寅 丑 子 亥 戌 酉 申

81 71 61 51 41 31 21 11 1.12

 

대운 시작: 1세 12월 3일

현재 나이: 65 세 (2016년 丙申년)

현재 대운: 甲

 

2013년 7월 12일 부친 Hun Neang 사망함.

 

'서프라이즈' 훈센 캄보디아 총리, 페아클리카 총격 사망 연루 '진실은?'

2016. 11.27(일) 11:00

 

서프라이즈 훈센 총리, 피셋 페아클리카 죽음 연루 의혹

 

[티브이데일리 연휘선 기자] '서프라이즈'가 캄보디아 총리 훈 센과 얽힌 여배우의 사망 스캔들을 밝혔다. 

 

27일 오전 방송된 MBC 예능 프로그램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이하 '서프라이즈')에서는 피셋 페아클리카의 죽음에 얽힌 비화를 소개했다.

 

피셋 페아클리카는 캄보디아의 국민 여배우로 1999년 7월 6일 프놈펜의 한 시장에서 권총 3발을 맞고 사망했다. 대낮에 벌어진 총격 살인 사건이었으나 현장에서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 어느 누구도 증언을 거부했다. 더욱이 용의자에 대한 언론 보도 역시 거의 사라졌다. 이에 페아클리카의 죽음이 단순 강도가 아닌 최고 권력자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 가운데 사건 발생 3개월 후 프랑스 잡지 '렉스프레스'가 페아클리카의 죽음에 대한 특집 기사를 보도했다. 바로 훈 센 캄보디아 총리의 아내 분 라니가 페아클리카의 암살을 사주했다는 것. 그 증거로 '렉스프레스' 측은 페아클리카 일기장을 제시했다. 일기장에는 페아클리카와 훈 센 총리가 연인 관계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렉스프레스'가 보도한 일기장에 따르면 1998년 8월 18일 갓 캄보디아 총리가 된 훈 센과 당대 최고의 여배우 페아클리카가 첫 만남을 가졌다. 두 사람은 첫 만남에서 첫눈에 반해 비밀 연인으로 거듭났다. 또한 훈 센 총리는 페아클리카에게 고급 주택과 거액의 생활비를 줬고, 그가 전 남편과 빨리 이혼할 수 있도록 사법부에 압력을 행사했다.

 

훈 센 총리와 페아클리카가 연인이 된 지 8개월 만에 총리의 아내 분 라니가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 챘다. 이에 1999년 4월 훈 센 총리가 페아클리카에게 이별을 고했다. 더욱이 분 라니는 페아클리카의 차와 집 등 훈 센 총리가 준 재산을 몰수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혹 렁디 경찰국장은 페아클리카에게 제 3국으로 떠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라고 협박까지 했다. 페아클리카가 망설이는 사이 시장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하고 사망에 이르렀다는 것. 뿐만 아니라 페아클리카 사후 그의 가족들은 페아클리카가 임종 직전 자신을 죽인 것이 총리 부인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밝혔다.

 

캄보디아는 폭로 기사로 인해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분 라니는 언론사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며 즉각 이 사실을 부인했다.

 

이후 2006년 같은 매체를 통해 페아클리카의 살해 사건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당시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 부국장 헹 뽀우의 폭로가 있던 것. 그는 죽은 페아클리카에게 협박했던 혹 렁디가 실제로 페아클리카의 죽음을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알고 보니 혹 렁디가 페아클리카를 훈 센 총리에게 소개했고, 분 라니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찾아와 따졌던 것. 헹 뽀우는 이에 혹 렁디가 분 라니에게 페아클리카를 훈 센 총리와 떼어 놓겠다고 약속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페아클리카를 살해한 범인은 혹 렁디의 개인 경호원이었으나 자신의 상관과 총리 부인의 연계로 범인을 공개할 수도, 수사를 더 진행할 수도 없었다고. 헹 뽀우의 폭로로 해당 사건이 국제 언론들의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헹 뽀우는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췄고 캄보디아 교도소에서 발견됐다. 그는 언론에 사실을 폭로한 뒤 핀란드로 망명을 신청했으나 출국 몇 시간 전 총리 명에 훼손죄로 90년 선고 받은 상태였다. 더욱이 주요 용의자로 주목 받은 혹 렁디는 2008년 의문의 헬기 폭발 사고로 사망했다.

 

사건 당사자들이 모두 사라짐에 따라 세간의 관심은 분 라니에 쏠렸다. 하지만 훈 센 총리는 페아클리카와 관련된 모든 의혹은 정적들이 만들어낸 모함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훈 센 총리의 정적인 삼 랭시의 인척이 페아클리카의 폭로 기사를 쓴 프랑스 잡지 '렉스프레스'의 직원이라는 근거를 든 것이다.

 

이후에도 훈 센 총리는 자신과 아내에 대한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결국 페아클리카의 죽음은 의혹만 남긴 채 지금도 논란으로 남았다.

 

 

훈 센(크메르어: ហ៊ុន សែន, Hun Sen, 1952년 8월 5일 ~ )은 캄보디아의 총리로, 캄보디아 인민당(CPP)의 핵심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자 정부를 1993년 다당제를 회복한 이후로 왕당파와 연합하여 캄보디아를 통치한 실질적인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다. 1993년 노로돔 시아누크 전 국왕에 의해 '삼데크'(Samdech)라는 직위가 화합적인 차원에서 부여되었다. 1975년 4월에 프놈펜을 공격한 크메르루주에 의해 부상을 당해 의안을 끼고 있다.

 

정치 경력[편집]

1951년, 콘폰체무 주에서 태어난다. 1970년 3월, 베이징 망명 중인 시하누크 국왕의 요청에 따라 론 놀 정권에 대항하는 캄보디아 민족연합정부군(크메르루주)의 각 급 부대 지휘관으로 일했으나, 1976년이 되면서 크메르루주의 과격한 정책에 실망하여, 1977년 6월에 폴 포트 세력에서 이탈해 베트남에 망명한다.

 

1978년 12월, 구국민족 연합전선 중앙위원 및 구국민족청년협회 회장으로 취임하였고, 1978년 후반에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크메르루주군은 패주하여 폴 포트는 태국과의 국경 근처로 피신했다.

 

1979년 1월 크메르루주가 전복되자 베트남은 헹삼린 정권을 출범시켰다. 같은 시기에 그는 인민혁명당 제3회 당 대회에서 당중앙 위원으로 선출되어 헹삼린 정권 발족 후 친베트남계 인민혁명평의회 멤버 겸 외무장관으로 취임한다.

 

외무장관으로서 그는 인도차이나의 평화를 정리한 파리평화회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1990년까지 재임하였다. 1986년에서 1987년에는 잠깐 그만두기는 했지만, 외무장관으로써 훈센은 인도차이나의 평화를 가져온 파리평화회담을 이끈 핵심 인물이었다. 챈 시가 죽은 1985년에 곧바로 수상이 되었다. 1993년에서 1997년까지는 노로돔 라나리드 왕자와 공동으로 수상을 역임하기도 했다.

 

1997년에는 라나리드 왕자와 훈 센 총리 간의 긴장 관계가 고조되어 연합이 흔들리기도 하였다. 라나리드 왕자가 이끄는 펀신펙 당은 크메르루주 반군의 잔당과 연합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을 자신의 군대로 끌어들이기 위함이었다.

 

이에 훈센은 유혈 군부 쿠데타를 거행하였고, 라나리드를 제거하고, 1997 ~ 1998년 웅 후오트와 공동 수상을 맡았다가 1998년 다시 단독 수상이 되었다.

 

훈 센이 이끄는 CPP에 의해 여러 왕당파 지지자들이 심문당하고, 고문을 당했지만, 훈 센은 개입을 부정하였다. 또한 그의 그러한 조치가 쿠데타라는 것도 부인하면서, 쿠데타를 일으켰다면 군주제를 폐지했을 거라고 주장하였다.

 

2003년 7월의 선거는 CPP가 국회의 다수당이 되는 결과로 끝났다. 그러나 CPP는 개헌 선인 2/3의 충족하지 못했고, 결국 2004년 CPP-푼신펙 연합으로 정부를 구성하였다.

 

에피소드[편집]

훈센은 전 세계 국가수반 중에서 상당한 애연가로 유명하다. 18세 때 내전 당시 정글에서 생활할 때 모기를 쫓기 위해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였는데 지금까지 끊지 못하고 있다. 주치의는 물론이고 가족과 국민들로부터 수시로 금연을 요구받아 실제로 금연을 시도했지만 전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국제회의장 및 손자/손녀들과 함께 있을 때는 담배를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1]

 


출처 : 사주명리(좋은사람 정모카페)
글쓴이 : 도무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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