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干支의 起源
*, 干支의 起源
1. 黃帝 軒轅氏에 의한 干支天降說
中國 宋代의 徐升이 저술한 『淵海』와 당시에 유행하던 비결집 『淵源』을 엮어 明末 당금지(唐錦池)가 발행한『淵海子平』의 ‘論天干地支所出’편에는 황제 헌원씨가 하늘로부터 干支를 받았다고 하는 간지의 기원에 관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있다. “간사함이 생기고 요사함이 횡행하여 황제(黃帝)때에 치우(蚩尤)가 병란과 횡포를 좋아 함으로 이때를 당하여 黃帝가 백성의 고통을 심히 근심하여 탁록(涿鹿)의 들판에서 치우를 주벌(誅伐)하니 유혈이 백리에 뻗혔다. 황제가 이때에 목욕제계하고 제단을 축조하여 天帝께 제례 기원하니 바야흐로 하늘에서 10干과 12支의 계시(啓示)가 강시(降示)되었다. 황제는 강시된 10干을 둥글게 펴서 하늘을 상(象形)하고 12支를 모나게 펴서 땅의 형상을 본뜨게 하였다. 이리하여 干은 하늘이 되었고 支는 땅이 되었으니 이를 각 부문에 적용하여 능히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2. 天皇氏의 創造說
明代 萬育吾가 저술한 『三命通會』 ‘論干支源流’편에는 간지의 기원에 대해 아래와 같이 주장하고 있다. “옛날 반고씨는 天, 地, 人 三才로서 首君을 삼고 천지가 나뉜 뒤에 먼저 天이 있고 뒤에 地가 있어 이로 인하여 氣가 化하여 人이 생기었다. 고로 天皇씨는 1姓 13人이 반고씨를 이어 다스리니 이를 천령담박(天靈澹泊)이라 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통속이 스스로 화하여 처음으로 天干의 이름을 제정하여 歲의 소재를 정하였으니 十干은 알봉, 전몽, 유조, 강어, 저옹, 도유, 상장, 중광, 현묵, 소양을 말하고 十二支는 곤돈, 적분약, 섭제격, 단알, 집제, 대황락, 돈장, 협흡, 군탄, 작악, 엄무, 대연헌을 말한다. 채옹(蔡邕)이 (그의 저서)『독단(獨斷)』에 이르기를 干은 幹(줄기-하늘)이고 그 이름은 十母라 하여 지금의 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이며, 支는 枝(가지-땅)이며 그 이름이 十二子라 하니 지금의 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이다. 이것은 天皇氏가 ‘天은 子에서 열리었다’고 이른 뜻이고, 地皇氏가 ‘地는 丑에서 열리었다’라고 한 뜻이며, 人皇氏는 ‘人은 寅에서 生하였다’라고 한 뜻이다. 그러므로 干支의 이름은 천황씨때 처음 제정하였고… (후략)”
*, 干支曆의 起源
1, 萬育吾의 『三命通會』 ‘論干支源流’편에는 干支曆의 기원에 관한 기록도 있다.
“누군가 말하기를 대요(大撓)가 斗柄을 점쳐서 甲子를 만들었으므로 반드시 天地가 시작된 시기까지 소급할 수 있으니 그러므로 年甲子, 月甲子, 日甲子, 時甲子의 四甲子가 曆元이 된다. 斗柄을 점치는 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바로 12개월을 정할 수 있으니 천지가 처음으로 개벽할 때 日月이 合壁하듯이 위치하였고 五星의 운행이 구슬을 꿴듯한 상태로 모두 北東北의 견우의 첫째별에서 출발한 후 夜半에 冬至點(子宮)에 이르렀다. 이는 곧 역의 움직일 수 없는 준법(準法)이 된 것으로 孟子가 이로부터 千歲의 曆도 가히 앉아서 알 수 있다고 한 것이니 지금의 역으로 考究하여도 맹자가 말한 것과 같이 알 수 있다”라고 했다. 淸代 요영해(寥瀛海-冀亨)는 그의 저서 『子平四言集腋』에서 “上古의 曆元이 四甲子를 일으켰으니 연월일시 四柱는 이에 근본을 둔다.”고 밝힘으로 黃帝 즉위년의 四甲子(BC 2696년)가 간지력의 曆元임을 확인했다.
2, 歲(木,寅)星 紀年法
대만의 양상윤(梁湘潤)은 그의 저서 『연해희기수필(淵海喜忌隨筆)』에서 干支를 이용하여 年度를 표기하기 시작한 것은 빠르면 漢順帝때부터 늦어도 漢獻帝(제위 서기 190년~219년) 때까지의 사이에 했다고 말하면서 그 이전에는 歲星(木星)의 위치를 가지고 년도의 표기에 사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曆法에서는 年度의 표기에 세성(목성)을 이용한 것을 ‘歲星紀年法’이라하고 干支를 이용해 년도를 표기하는 것을 ‘干支紀年法’이라고 한다. 劉安이 저술한 淮南子에 세성기년법에 관한 기록이 전한다. “木星(歲星혹은 寅星)의 공전주기는 12년(정확히는 11년 315일)으로 목성의 운행궤도를 12등분 하여 황도 12궁을 정하고 각 구역에 이름을 붙여 寅, 卯, 辰, 巳, 午, 未, 申, 酉, 戌, 亥, 子, 丑이라하여 이를 12辰이라 했다. 목성은 1년에 1辰씩 이동하여 목성이 寅의 자리에 있으면 寅年, 卯의 자리에 있으면 卯年이 되니 이와 같이 하여 12辰이 결정된다“고 했다.
3, 干支紀年法 : 干支를 이용해 년도를 표기하는 것
*, 六十甲子 納音五行의 成立
가. 萬育吾의 三命通會(干支源流)
“복희씨에 이르러 우러러 하늘의 象을 관찰하고 굽어 땅의 法을 관찰하며 만물과 사람의 이치를 관찰하여 비로소 八卦를 그려 神明의 덕에 통하고 (중략) 황제에 이르러 하도(河圖)를 전수하고 日月星辰의 象을 보아 星官(天文)書를 만들었고 大撓에게 五行의 실상을 탐구하게 하고 斗綱(斗柄)이 세워지는(가리키는) 것을 점치게 하였으니 이로부터 甲子가 시작되었고 納音五行이 배합되었다.”
나. 徐升의 淵海子平(論六十花甲子納音註解)
“그 후 大撓氏가 집정 하실 때 후인을 근심하고 말씀 하시기를 ‘통탄스럽도다! 黃帝는 聖人이신데 오히려 惡殺을 간단히 治化하실 수 없었거니와 後世에 재난을 당하고 고액(苦厄)을 받을 때에는 어떤 방법으로 해구(解救)할 수 있겠는가?’ 하시고 드디어 10干과 12支를 분배하시어 六十甲子, 등을 작성하였다. 六十甲子는 大撓氏가 비로소 이루었고 납음은 鬼谷子에 의하여 성립 되었으며 象은 만청자(蔓倩子-東方朔)가 지은 것이다. 만청자가 이미 象을 작성하였으므로 花甲이라 하였다.” 60甲子는 甲子, 乙丑 ‘海中金’, 丙寅, 丁卯 ‘爐中火’ 등으로 시작되어 마지막 壬戌, 癸亥 ‘大海水’로 끝나는 두 개의 간지에 하나의 상징성 있는 五行을 배속시켜 古法에서 사주를 볼 때 이용했다. 『이허중명서』에서는 출생 年柱의 天干을 祿, 地支를 命, 年柱의 納音五行을 身이라하여 祿命身을 三命이라고 부르며 감명 할 때 중요한 요소로 활용했다.
다. 사주학이란 인간이 불확실한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찾아낸 여러 가지 술수 중 한 분야로서 출생 년월일시를 天干, 地支 여덟 글자(부호)로 바꾸어서 그 干支에 陰陽과 五行을 배정하고 음양오행의 生剋制化의 원리에 의해서 한 개인의 운명을 판단하는 학문이다. 이렇듯 사주학이 干支 八字 오행의 생극제화 작용을 관찰하여 한 개인의 운명을 예측하는 학문이라면, 天干과 地支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최초로 만들어졌는지, 누가 천간과 지지에 음양오행을 붙이는 법을 창안하였는지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간지의 기원에 관한 명확한 고증은 비록 어렵지만 언제부터 무슨 용도로 간지를 사용했는가에 관련된 유물이 은허(殷墟)의 유적에서 발견됨으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淸末 1899년에 하남성 안양시 소둔촌(은왕조의 수도)에서 대량의 귀갑(龜甲), 우골(牛骨)이 발견되었는데 이 유물에 갑골문(甲骨文)으로 기록된 干支가 적혀 있는 것이 확인 되었다. 이것은 은왕조(殷王朝, 약 BC 16세기~ BC 11세기, 商王朝라고도 한다)시대의 점복(占卜)유물로서 은왕조 시대에 이미 간지를 사용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으며 간지의 생성 기원은 그 이전이라고 추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유물에 기록 되어있는 간지는 점을 친 날자만 표기할 목적으로 사용했을 뿐 점의 내용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으니 당시에는 간지를 사용해서 점을 친 것은 아니었다. 이후 한(漢)나라 헌제(獻帝, 제위 190~219)때에 비로소 간지를 이용해서 년도를 표기하기 시작 하였으니 干支 여덟 字를 사용해 추명하는 사주학은 그 이후에야 비로소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치우환웅은 우리 동이족 환검시대의 배달국 천왕으로 야사(환단고기, 규원사화, 등)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탁록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야사에서는 복희도, 자부선인도, 공자도 우리 동이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야사적인 요소는 더욱 적극적으로 이슈화해서 정사로의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또한 단군의 고조선을 넘어서는 환인, 환웅시대의 환국, 신시배달국의 역사도 복원되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9,000년 역사의 환역(桓易)도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