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복음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
(고전2:2)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
성경을 통해 우리가 확신하는 바는 창조에서 종말까지 피조세계 전반에 걸친 모든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께는 전달하고자 하시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 메시지는 단연코 십자가 위에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희생을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기로 결심하셨고 계획하셨고 결행하셨다. 세상은 하나님의 희생을 납득하지 못하고 폄하하며 왜곡하려 들지만 은혜는 언제나 이 희생 위에 견고히 선다. 두말할 나위 없이 십자가야말로 복음의 핵심이다.
1. 십자가 없는 세상
불확실성의 도전으로 인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약간 주춤하는 듯 보여도 인류 문명의 영원한 진보를 믿는 낙관주의는 20세기 초까지 광범위한 대세로 자리매김 했었다. 오늘날 성공은 모든 다른 가치들을 획일화했고 문명에 대한 신뢰는 넘쳐난다. 욕심은 다른 욕심을 제어할 수 있는 훌륭한 장치라는 측면에서 시장경제의 무한경쟁은 선한 것으로 여겨진다. 보호자를 상실한 가인의 후예들은 저마다 자기의 성을 짓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단 한 가지의 가치, 곧 자아의 성취를 위해 존재한다.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 판치는 세상에서 세상은 자기계발과 성공학 그리고 모든 자기 중심주의적 쾌락에 미쳐가고 있다.
물론 성공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은 자기 의를 세우고 만족을 채우기 위해 선행과 봉사도 한다. 그들은 세상에서 인정받고 높임 받는다. 성공의 정당성과 방법에 대해서는 격렬한 논쟁이 많아도, 성공을 누리는 자아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죄가 자취를 감추는 사이 민주주의는 신성화되었고, 이 마지막 때에 우리는 스스로 멋진 우상이 되고 말았다. 세상은 그렇다 치자. 문제의 심각성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가신 적이 있다.(마16장) 가아사랴 빌립보는 황제의 이름을 딴 도시였다. 오늘날에도 수로와 더불어 해변도시의 유적이 남아있는 그곳에서 예수님은 정체성(Identity)에 대한 질문을 하셨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무리들은 예수님에게서 한결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을 떠올렸다. 예수님은 선하시고 하나님의 능력 있는 종이지만 그래도 정치와 종교 지도자들에 비해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무리들은 과거의 그 영광스러운 선지자들을 떠올렸지만 그들의 피 묻은 음성이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 울리고 있다는 사실(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다른 제자들이 해변 도시의 위용에 눌려 있을 때 베드로는 대답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은 매우 기쁘셨다. 복음서를 통틀어 그 분이 이토록 기쁨에 휩싸여 칭찬하시고 축복하시는 모습은 드물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로 다음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에 대해 반대한다. 그는 그리스도이신 주님의 희생(피)에 반대했다. 그는 성공하는 예수를 원했다. 어쩌면 그는 권능과 기적을 행사하며 당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무리들은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 어떤 가능성도 찾지 못했고 베드로는 (절대적인 은혜로 비로소) 그 가능성을 보았지만 그마저도 성공으로 ‘잘못’ 보았다. 결국 그 당시에는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지 못했다.
그러면 오늘날은 어떠한가? 그 때로부터 2천년이 지난 오늘날이라 해서 상황은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앞서 언급한 대로 세상은 성공과 자아실현에 미쳐 있다. 사람들은 유익한 새로운 소식(News)에 열광하지만 우리의 실재에 대한 좋은 소식(Good news)에는 별 반응이 없다. 복음은 식상한 교리나 고상한 도덕 강론 정도로 폄하되고 있다. 주님은 왜곡된 당신의 모습이 퍼져나가길 원치 않으셨고 지금도 그러하시다.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마16:20) 정당한 복음전도에 도전하는 가장 강력한 장애물은 언제나 왜곡된 복음이다.
2. 왜 십자가인가?
십자가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분리됨이 가장 크고도 본질적인 문제임을 알려준다. 성경은 이 분리됨을 일컬어 “죄”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본래 의도에서 벗어나버린 모든 것은 죄다. 그 분과 연합되지 않는 것은 죄라고 불려야만 한다. 세상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세상에 산재한 여러 부조리들이 아니라 세상이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우리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세상은 결국에 사라지게 될 땅이다. 세상은 심판 아래 있고 그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결코 없다.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하늘은 떠나가고 물질은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그 가운데 모든 일이 드러나게 될 것”(벧후3:10)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리라는 사실은 지금의 하늘과 땅이 모두 낡은 것이 되어 폐기될 것임을 동시에 알려준다.
사실 구약은 십자가에서 쏟아져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하다. 아담은 하나님을 불순종하여 떠났으나 하나님은 그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아담 앞에서 그 짐승은 가죽을 내놓기 위해 피 흘려야 했다. 아벨은 아직 육식을 하지 않던 시절에 스스로 양치는 자가 되었고 피 있는 제사를 드렸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제물을 쪼개어 드렸고 그의 자녀와 손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애굽에서 노예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나가서 하고자 했던 것은 다름 아닌 ‘희생’제사였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은 계속해서 피제사를 드렸고 이를 위해 그들의 가운데에는 언제나 성막이 있었다. 말 못하는 동물이 사람의 죄를 대신했고, 죄가 씻긴 인간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다. 아무런 주권 없는 동물이 피 흘리면서 그 피로 죄 씻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께 삶의 주권을 양도했다. 죄에는 언제나 피가 따랐다.
그러나 이 피 흘림은 한시적인 것이고 죄를 사하는 능력에 있어 제한적이었다. 사실상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내가 직접 죽어야만 한다. 그것도 영과 육이 완전히 심판받고 정죄 받은 후 멸망해야하는 것이다. 이 죄는 성품과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와 능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을 마시지만 다시 목마르게 되고 밥을 먹지만 다시 배고프게 되는 것처럼 양과 소의 피는 영적존재인 인간의 죄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놀랍게도 성경은 이 모든 것이 사실 참된 실제에 대한 예표였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결심하신다. 참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시고 참 죽음을 치르기로 하셨으며 이로써 당신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기로 결정하신다. 성경은 이 결심과 실행의 동기를 사랑이라고 한다. 이 은혜로운 사랑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실현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나 사랑이 하나님인 것은 결코 아니다. ‘무엇이 그리 심각한 죄인가’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철저히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선 반역자들에게 참 왕이신 그 분은 자비롭게도 사면의 깃발이 올리셨다. 복음이 용서의 내용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중대한 잘못에 대한 용서인지를 아는 것이 우선이다. 율법은 복음에 앞서 주어졌다.
십자가에는 대표와 연합의 원리가 흐른다. 십자가 복음은 내가 그를 나의 주인으로 인정할 때에만, 그리고 그의 죽으심에 연합할 때에만 효력을 발휘한다. 달리 말하면 십자가로 자신의 죄 값이 지불되었음을 ‘믿는’ 자들은 누구나 그곳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게 되고 자신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내어드리게 된다. 십자가의 광명 앞에 도달하면 어두운 곳에서 숨겨왔던 죄들은 드러난다.
우리는 죄로 인해 십자가를 의지하지만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더욱 드러내어 복음의 능력을 철저히 의지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십자가를 더욱 붙들게 될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자리에서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능력이 나온다. 이른바 부활의 능력이다. 십자가의 결론이 부활이라는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최대 기쁨이다. 복음은 죄를 반성하는 것 이상이다. 우리가 받은 영생은 구사일생 이상이다. 겨우 살아나 목숨만 부지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히 살아가는 것, 바로 그 영원한 삶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하게 된다.
그러므로 결국 십자가 복음이 제시하는 바는 하나님 그분 자신이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은 죄에 대해 십자가는 보혈을 쏟아내고, 참소하며 끊임없이 살인하는 마귀에게 십자가는 부활의 권능을 행사한다. 값은 치러지고(속죄) 사망은 제압되었다(구원). 십자가는 하나님만이 복음의 진정한 목적임을 증명한다. 그 분은 우리가 당신에게로 향하는 큰 길을 활짝 열기 위해 그 길에 거치는 어떠한 장애물도 용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 아들의 죽으심으로 세운 하나님의 지엄한 결의의 표시는 단호하다. 이 결의는 그 어떤 죄보다 근본적인 하나님을 향한 그 죄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자들에게 이 결의는 그 생명으로 살라고 말한다. 우리가 인생 가운데 겪을 수 있는 어떤 어려움도 아버지로부터 거절당하시고 친히 제물이 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어려움에 비할 수 없음을 알려주는 십자가는 우리 모두에게 참된 위안이 된다.
3.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자
십자가는 사랑의 확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에게 확증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사랑도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확증되어야 한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사실은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게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음에도, 우리는 그 사랑을 사탕 몇 개 손에 쥐어주는 정도의 것으로 퇴색시켰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 가운데 행하셨지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하나님께 강요한다. 우리는 영원한 삶 대신에 찰나의 가치들에 집중한다. 이런 자들에게는 어쩌면 영생의 복음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이 모두 칭찬하는 것은 십자가 복음이 아니다. 세상은 십자가 복음을 칭송하지 않는다. 오히려 십자가를 부담스러워하고 싫어하기까지 한다. 구제와 선행과 나눔은 모두 필요하다. 그러나 결코 복음전도보다 앞설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의논하지 않으시고 그 분의 탁월한 지혜와 능력으로 사랑하셨다. 언제나 그 분이 옳고 우리는 그릇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그 분의 방식, 곧 십자가가 언제나 옳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는 우리에게 고난의 영광을 알려준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종류의 고난을 기뻐한다. 확실히 축복된 환경과 좋은 여건보다는 고난이 훨씬 기쁘다. 하나님의 성품에 의존하는 숭고한 모든 가치들은 고난 가운데 더욱 빛난다. 믿음을 살아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다. 유혹도 많고 때때로 우리는 홀로 남겨진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상황이 더 어려워질수록 우리가 예수님께 더욱 의존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사실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더욱 깊이 들어가기 위해 다른 가치들을 기꺼이 포기한다. 우리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 환난은 도리어 소망을 이루고 소망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퍼부어준다. 이런 사람을 세상이 능히 감당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십자가
십자가의 결국은 부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복음이란 바로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소식이다. 생명의 주관자라는 사실과 죄의 대가를 치르셨다는 사실, 그리고 사망 권세를 이기셨다는 사실은 그 분이 그리스도, 곧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가장 확실한 증명이다. 다시 사신 그 분을 믿고 영접하는 자들에게 부활의 생명이 되시는 그분을 통해 우리도 다시 살게 될 것이다. 다시 수치가 없는 그 영광의 날에 우리의 전파함을 통해 새 생명 얻은 자들도 함께 일어나게 될 것이고 우리는 주와 함께 왕 노릇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영광의 십자가를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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