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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본주의 - 인본주의

정발드 2018. 6. 27. 17:15
신본주의 - 인본주의

 

 

 



 

 신본주의


  


 신본주의란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있어서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신본주의라 한다. 

하나님 중심이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경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사람마다 각기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약간 다를 수 있기에 논란이 될 수 도 있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살아계신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따라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사람마다 다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확실한 믿음의 토대위에서 생각한다면 오히려 간단하다.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삶, 즉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자기 나름대로 편리하게 해석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뜻이 정확히 무엇인가를 깨닫고 

(물론 이것은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친히 인도하시고 알게 하신다. 

즉 예수님을 구주로 진정 영접했다면 말씀을 보고 기도하고 묵상할 때 분명 우리 주님께서 깨닫게 하신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못하면 당연히 그 뜻을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 말씀대로 철저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삶을 신본주의라 할 수 있다. 


  


  


 인본주의 


  


 인본주의란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인정치 않고 아니면 인정한다 하더라도 자기의 쾌락을 위해선 즉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기 중심 즉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인본주의라 한다. 

여기서 자기 중심적 즉 인간 중심적이란  말은 매우 정의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본인 각자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성경에 많이 나온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역을 감당하실 때  얼마나 많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핍박하고 저주했는가를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즉 그들은 자기의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후에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악한 무리였고 그 당시 예수님께서도 악한  무리들이라고 꾸짖으셨지 않은가? 

우리는 여기서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다. 

과연 내가 신본주의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인본주의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수도 없이 인본주의적 신앙 생활을 해 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는 명확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명확히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5∼36)

 

 


인본주의 신본주의

 

 

    사람들은 오랜 역사 속에서 인간을 모든 가치의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삶에 익숙해 있다. 그 때문에 나를 모든 생각과 행동의 출발점으로 삼아 세계와 우주의 모든 것들을 나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려 한다. 이 때 나는 세계와 우주의 중심이다. 그런 관점에서 내가 있으므로 해서 모든 것이 있는 것이고 내가 없으면 모든 것은 없는 것이다라는 말은 인본주의의 핵심적 가치를 표현한 것이다. 이 때 나는 스스로가 결코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은 잊는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결정할 능력도 권한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임의로 할 수 있는 능력도 결정권도 없다. 자기존재에 대한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는 것조차도 타당치 않다. 인간은 스스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지도 않았고,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또 일정 조건 아래에서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인간은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상대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를 모든 가치의 중심에 놓을 수가 없다. 내가 나 자신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것들과 그와 관련된 모든 일들을 결정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1. 우연인가 필연인가

   현대사회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진리처럼 이해하고 있는 진화론은 과학적 합리성을 강조하면서도 우주(물질세계)가 존재하게 된 최초의 원인에 대해서는 어떤 우연에 의한 것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논리를 전개한다. 그러나 과학적 이론은 결코 우연을 전제로 이론을 전개할 수 없다. 원인을 확증할 수 없는 이론은 그것이 아무리 그럴듯하다 해도 공중누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화론적 과학자들은 그 태초의 우연을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증명하기 위해 이시간도 몸부림 치고 있다. 그러나 과학정신이 그러하듯이 과학자라면 누구나 당연히 그 태초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히 밝히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물리적 현상을 기반으로 하는 학문이 태초의 제일 원인을 밝혀내는 것이 가능할까? 단언하거니와 현재까지 인간이 발전시켜온 과학적 접근법으로는 거시의 우주에 대해서도 그 우주가 무한한 것인지 유한한 것인지조차도 끝내 밝혀내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또한 미시의 세계에 대해서도 궁극의 원인물질이 무엇이었는지도 끝내 밝혀내지 못할 것이다.

   ​거시의 세계는 무한대와 같아서 그 궁극의 끝을 정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미시의 세계 또한 수학의 점1과 같이 그 궁극의 끝을 정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 둘은 물리적 차원의 세계를 넘어 영원으로 이어져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시적 관점으로 접근하든지 아니면 거시적 관점으로 접근하든지 물리적 시공간의 인식계(認識界)라는 틀 안에서는 그 어떤 것의 궁극(窮極)도 정의할 수 없다. 따라서 육체의 인지력에 의존하고 있는 인간은 현상계의 궁극을 말할 때에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우연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한대, 점이란 개념과 함께 영원이란 개념을 이미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이란 천재에 의해서 물리적 세계의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이 또한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시간과 공간이 서로 다른 무엇이 아니며 본질이 하나인 것인데 그것이 물리적 현상계에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태로 다르게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시간을 초월하면 동시에 함께 공간도 초월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2. 그리고 그렇게 시공간을 초월하는 세계는 영원의 세계라는 점에서 볼 때 이 현상계 또한 영원에 잇대어 있는 세계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적 시공간세계의 제한 속에 매어있는 존재는 어느 누구도 무엇도 시공간을 초월할 수 없으며 무한과 동시에 점일 수가 없다. , 영원한 존재일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원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영원을 시공간세계의 출발점으로 하지 않으면 현상세계의 궁극적 원인에 대해서 아무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현상세계인 시공간 우주의 태초를 영원으로 본다면, 영원은 물리적 존재의 영역일 수가 없으므로 영적 존재인 신의 영역으로 이해함이 마땅하다.

   ​그리고 영원의 존재인 신을 인정할 때 물리적 세계인 시공간의 세계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지정의의 존재로서의 신의 계획에 의한 필연적 결과로 설명될 수 있으므로 이것이 진정한 과학적 이론이며 완전한 이치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의 존재이신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오만과 독선이 자신의 존재마저도 모순의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어리석음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2. 역사의 주체가 누구인가

 

    인간이 있어온 이래 모든 인간은 자기를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여 왔다. 그래서 사람이 둘 이상 모이면 서로 역사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경쟁한다. 따라서 역사에 대한 인간의 주도권 경쟁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항상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소규모의 모임에서의 다툼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다툼과 무력을 통한 전쟁도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어느 누가 역사의 주도권을 차지하든지 절대적 주권을 행사하며 역사를 주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인간은 스스로의 한계성으로 인해 여러 가지 다양한 경우의 환경들에 크고 작은 영향들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는 유사 이래로 탁월했던 영웅호걸들도 예외가 아니었고, 위대했던 천재들도, 대단했던 권력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렇듯 인간은 스스로 완전할 수 없는 존재이다.

   성경은, 모든 역사를 주관하는 주권은 선악판단의 권한을 행사하는 왕권(재판권)으로 제시하면서 선악판단의 주체가 인간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한다. 인간이 왕권을 가지게 되면 인간끼리 서로 절대적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는 경쟁과 갈등의 관계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주권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러한 욕망이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경우에 따라서는 선과 의를 이루기 위한 열정으로 설명될 수 있을 지라도 그렇게 주장하는 선과 의의 기준이 그것을 욕망하는 자에게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선과 의를 추구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전혀 선하지도 의롭지도 않을 수 있다.

   ​따라서 당연히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마찰과 갈등이 수반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이 주권자가 되기 위해서 더 많은 지식을 가지려 하고, 더 큰 힘을 가지려 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고, 할 수만 있으면 삶과 죽음의 한계성마저도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도 없고, 완전한 힘을 가질 수도 없으며, 모든 것을 소유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결코 삶과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한 존재가 될 수도 없다. , 사람은 스스로 영원한 역사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인간이 역사의 주체가 되면 역사의 방향성이 인간에 의해 결정되고 역사를 주도하는 인간이 바뀔 때 마다 역사가 흐르는 방향성이 바뀌게 되면서 인간의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 과정마다 파괴와 건설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혼란을 겪게 된다.

   인간은 태초의 역사를 출범시킨 존재가 아니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를 출범시키셨고 창조주 하나님만이 이 역사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고 밝혀준다. , 영원과 시공간의 모든 역사의 주체는 모든 역사를 시작하신 창조주 하나님뿐이시라고 선언한다. 왜 그런가 하면 그분만이 유일하며 절대적이며 완전한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3. 절대적 존재와 상대적 존재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외에 영계와 물질계의 모든 피조물들은 절대적 존재일 수가 없다. 모든 피조물들은 창조주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상대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창조주가 있으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들은 그 존재의 원인과 그 원리와 그 목적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오직 창조주에게 있기 때문이다. 창조주가 있으므로 존재한다는 개념은 창조주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 창조주가 사라진다면 모든 피조물은 동시에 사라질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자존자(自存者)이시며 로고스(λόγος, logos)라고 밝히신다.4 (하나님에 대해서는 기독교와 하나님편에서 상세히 논할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절대적 존재이시지만 인간은 상대적 존재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분명히 당신의 뜻에 따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천지창조를 시작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는 창조주의 이러한 목적이 완성되는 방향으로 흘러가야 한다.

   ​그러나 상대적 존재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절대적 존재이신 창조주의 절대성에 기인한 창조목적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오히려 창조주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은 자신이 어떤 목적을 정하고 그 목적을 향해 역사를 이끌어가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

   ​물론 인간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창조주 하나님의 영원한 창조목적이 왜곡되어 역사가 다른 결과로 흘러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렇게 하는 인간에게는 그것이 불행이다. 그 까닭은 그렇게 하는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벗어나게 되어 영원히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존재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창조주의 목적에 따라 역사가 진행되지 않고 피조물인 인간의 목적에 따라 역사가 진행된다면 결과적으로 그 역사가 실패의 역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불을 보듯 확연하다.5 인본주의는, 이러한 사실을 외면하고 피조물인 사람을 역사의 주권자로 인식하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신을 인정하는(유신론) 인본주의나 신을 인정하지 않는(무신론) 인본주의가 본질상 다르지 않다. 그리고 신을 인정하는 인본주의자들은 스스로는 신을 인정한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그들의 삶에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의 의식 속에 있는 하나님은 절대적 존재로서의 창조주가 아니다.

   ​그들의 의식 속에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창조자도 아니다. 그저 인간의 조력자로서의 신일뿐이다. 이는 인간들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의식 속에서 만들어낸 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본주의자는 무신론자라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인본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이해하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의 세계() 안에 하나님을 끌어들여놓고서 그 하나님을 이해한다. 그리고 자신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그 하나님을 자신의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방편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하나님은 이미 창조주가 아니며 절대자도 아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자신만의 <다른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무한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시공간의 현상계에 묶여있는 존재가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그리고 어디까지 가능할 수 있을까?

   인간은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존재의 속성에 맞게 겸손해져야 한다. 그럴 때 오히려 창조주의 은총 속에 지식과 지혜는 더욱 확대될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좀 더 가까이 그리고 풍부함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절대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온전히(절대적으로) 의존하지 않고는 육체적 존재로서의 한계를 결코 벗어날 수가 없다.

 

     

    4. 창조주를 인정하라

 

    자기 자신을 기독교 종교인으로 인식하는데 멈추지 않고 진정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스스로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창조주를 인정한다는 것은 나(自我)의 존재의 원인과 이유와 목적이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믿음이 아니라면 창조주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며 그런 사람을 참된 기독교신앙의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다. 내가 존재하는 원인과 이유와 목적이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 있다고 믿는 신앙이 아니라면 그런 신앙은 세속적인 무속신앙(巫俗信仰)과 다르지 않다.6

   모든 피조물에게서는 창조주가 부여하지 않은 의미와 가치가 자체적으로 생성되거나 하지 않으며 피조물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도 없다. 당연히 피조물은 창조주를 인정할 때에만 자기존재도 인정될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창조주를 통해서만 자기존재의 의미와 고유한 가치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서 질문해 왔고 지금도 그 답을 찾기 위해 모든 학문을 동원하고 있다. 아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하여 고대에 철학이 시작되었고 현재의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는 수많은 학문들이 고대의 철학으로부터 발전하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 오랜 역사 속에서도 아직 인간은 인간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밝혀주는 답을 얻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인간은 스스로 창조주에게 귀속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자신을 창조주의 위치에 올려놓으려고 몸부림치는 역사를 함께 진행해오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 사람들은 그 역사의 구체적인 성과가 나타날 것을 한껏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 이루어놓은 현대 문명의 결과들을 보면서 스스로 감탄한다. (이 또한 창조주의 허용하심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인간이 문명을 발전시켜가는 역사가 워낙 빨라서 이 문명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어 갈지 가늠하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어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이 문명을 발전시켜 간다 할지라도 상대적인 존재인 인간은 절대적 세계의 경계를 넘지 못한다. 이는 물리적 존재가 시공간의 경계를 넘어갈 수 없는 이유와 동일하다. 그리고 인간에게 그 한계를 넘는 유일한 출발점이 있다면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이 ​창조주를 인정하면 그 순간 상대적 세계에서 절대적 세계로, 유한의 세계에서 무한의 세계로, 순간의 세계에서 영원의 세계로 그 모든 영역이 넓혀진다. 그리고 그런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창조주께서는 인간에게 열어주셨다. 창조주의 말씀인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라고 밝혀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으로부터 이 세상에 오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그가 영원으로부터 오셨기 때문에 그와 함께하는 이들을 영원으로 이끌 수 있다고 밝혀준다.7 물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전제 하에서 인간이 영원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본주의의 사상과 그 길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을 상대적이며 유한하고 순간적인 존재로 영원히 묶어둔다.

 

 

    5. 왜곡된 신본주의

 

   종교에서 인본주의와 다를 바 없이 문제가 되는 것이 다양한 형태의 왜곡된 신본주의다. 그 중에도 강한 사명의식을 가지고 이 땅에 신의 절대적 통치가 이루어지는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사명의식을 불태우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실체는 신을 빙자한 극단적 인본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신에게로 나아가서 신과 동화되기 위한 신본주의의 본질을 버렸다. 오히려 신을 인간의 세계로 끌어내려 물리적 세계의 신으로 전락시키면서 그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을 실현하려고 집착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엔 인본주의 거부하는 것 같지만 신의 대리자를 자처하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엄연한 인본주의자들이다.

   ​그들이 말하는 신국(神國)은 여전히 시공간의 영역에 속한 물리적인 세계일뿐이다. 그들이 말하는 신국의 풍요로움은 물질만능주의의 또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이 말하는 영원은 단순히 계속되는 시공간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인본주의적 생각들은 본질적으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을 수용한 사건의 연장선상에 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침범하지 말라 하셨고 사탄은 그 주권을 인간이 소유하면 그것을 소유한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유혹했다.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그러한 유혹을 받아들여 선악지식나무의 열매를 취하여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절대주권인 선악판단의 권한을 행사하는 존재가 되었고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서 벗어나는 결과를 가져와 아담과 하와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같이 인본주의는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내면의 욕망이 인간의 삶에 표출된 사상체계이며 지금도 그러한 인본주의적인 가치관 또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에덴동산에서와 같이 사탄에게 그렇게 속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본주의적 기독교 신앙인들은 그들이 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명자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가치관을 바꾸려 하지 않으며 다른 가치관에 설득되지도 않는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상들이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와 이슬람 극단주의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다윗왕국이라는 신정국가(?)의 건설에 자신들의 존재의 목적을 삼으며,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이슬람국가라는 신국을 건설하는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동한다.

   신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유신론적 운명론은 또 따른 형식의 왜곡된 신본주의다.8 그들은 철저한 신본주의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생각에 의하면 하나님은 유기적인 우주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기계적인 우주를 창조하신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무엇을 하라 하시거나 무엇을 하지 말라 하실 이유가 없다. 무슨 약속을 하실 이유도 없고 율법을 주실 필요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인간에게 있는 자유의지는 창조주 하나님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의지라는 의미 자체가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추구하는 하나님나라는 기계적인 하나님나라다. 그 백성들과의 관계는 서로 사랑하며 교제하는 관계가 아니라 삭막한 인과관계(因果關係)일 뿐이다. 그런 나라는 더 이상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나라일 수가 없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을 크게 오해한데 따른 생각이다.

   진정한 신본주의를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9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의 한계성을 깨달아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이 스스로는 결코 창조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없음을 시인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는,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와 같은, 자기를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기 위한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좇아가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부활하여 전혀 새로운 생명의 존재로 거듭나는 것,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창조되는 것이 진정한 신본주의의 길인 것이다.10

​   사람이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할 이유는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죽어 사망의 존재가 되었고 그 사망에서 다시 생명의 존재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와 하나가 되어 다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이것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유일한 길이며 이렇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 창조주께서 인간을 육체로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유일한 이유와 목적이다.

   ​그러나 인본주의와 왜곡된 신본주의는 이 길을 가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 길을 가고자 하는 자들을 가지 못하도록 훼방한다.

    

 

     6. 뒤섞인 가치관

 

    인간은 언제나 스스로 생각하기에 현명한 판단이라고 여기는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현명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그릇되지 않으며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방향으로 생각을 하고 그 결과를 따른다. 그래서 극단적인 사상이나 행동은 피한다.

   그런 생각을 가진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철저한 신본주의는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으며 객관적인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생각하되 인본주의에 의한, 육체적 존재로서의 이성적 합리성을 가지고 신앙생활에 관한 모든 일들을 판단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들의 생각은 자기 자신 또는 인간이 판단의 주체가 되어있다. 철저한 인본주의적 가치관이 그 생각에 작용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적 가치에 따른 사고와 생활이 그 삶에 함께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은 두 가지 가치관이 뒤섞여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자신들의 가치관을 이성적 합리성, 균형, 조화로움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부분에 있어서도 매우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 19:19.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이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양 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 - 22:9~11.

   위의 말씀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세속의 문화와 사상이 들어와 가치관이 뒤섞이는 것을 은유적 표현을 사용하여 금하신 내용이다.

   인본주의와 신본주의의 가치관을 섞는 일은 사탄이 진리를 왜곡시키기 위해 즐겨 사용하는 매우 효과적인 도구다. 사탄은 이 도구를 사용하며 아벨과 셋 계열의 영적 흐름(신본주의)을 세상의 역사에서 퇴출시키는데 거의 확실히 성공한 듯이 보였다.11

   ​인본주의의 가치관은 죄와 사망의 존재, 육체적 존재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그만큼 매우 강력한 흡인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영원히 육체의 존재로 얽매어 두려 한다. 그리고 완전한 육체의 존재가 되어버린 인간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다시 영의 존재로 되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성경은 가인의 역사를 들어 우리들에게 확인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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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는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역사가 출범하면서 사탄의 유혹을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의 본질에 새겨진 두 가지의 가치관임과 동시에 이후 가인과 아벨()을 통해 인류의 역사에 나타난 두 줄기의 역사의 흐름이며 나아가서 인류의 역사가 마감될 그 순간까지 이어져 갈 인류역사의 바탕과 배경이 되어 예외 없이 모든 시공간속의 인간의 삶에 작용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중심의 가치관과 역사(신본주의)를 지키라고 사람에게 말씀하시고, 사탄은 사람중심의 가치관과 역사(인본주의)를 지키라고 사람을 설득한다. 그런데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죄와 사망의 존재가 되어 영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육체에 속하여 육체의 한계성에 묶여있기 때문에 사탄의 논리에 매우 취약한 존재가 되어있다.

   ​그러나 인간은 영이 죽어 육체의 존재가 되어있기 때문에 절대로 육체의 한계성을 스스로 극복할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스스로 자신이 죽어있는 존재,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 도구로써 율법이라는 거울을 주셨다.

   율법을 거울로 주신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을 통하여 자신이 사망의 존재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인간에게 오로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자신을 맡겨드림으로써 창조주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역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시며 창조의 목적을 완성하시겠다고 구속사의 전 과정과 당신의 메신저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말씀해오셨다. 그러나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그 가치관 때문에 해석의 방향을 전혀 달리한다.

   중요한 것은, 가인의 후예들의 전유물인 인본주의는 창조주의 창조목적인 하나님나라에는 절대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12 인본주의가 이루어가는 것은 하나님나라가 아닌 인간의 나라다.13 이는 계시록에서 말씀하는 음녀와 바벨론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나라만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세워지는 하나님나라다. 그 나라만이 영원한 하나님나라다.



  1. 수학에서의 점은 아무리 확대해도 부피나 면적을 가지지 않는 개념상의 점일 뿐이다. 무한대 역시 아무리 축소해도 결코 그 크기가 줄어들지 않는 개념이다 그런 관점에서 무한대와 점은 그 개념만 다를 뿐 속성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물리적 세계에 개념만 존재할 뿐 실재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궁극의 원인물질을 확인하기 위해서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개면 마지막에는 무엇이 남을까 하는 것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인류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과학적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물질이 있을 수 있을 까? 현대과학의 중심축의 하나로 이해되고 있는 양자역학의 이론을 통해 모든 물질은 당연히 쪼개질 수 있는 것이며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물질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불합리하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것 그것은 로고스-logos"-다.
  2. 물질은 결코 빛보다 빠르게 이동할 수 없으므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3. 고대 사회에서는 왕이 역사의 주권자였다. 따라서 왕이 절대 선이다. 다른 사람의 판단은 의미가 없다. 즉 왕이 된다는 것은 선악판단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역사(歷史)의 주권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은 어느 누구도 절대선(絶對善)을 행사할 수 있지 못하다. 인간에겐 절대적 가치가 없고 절대적 가치를 행사할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4. λόγος는 헬라 철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개념이다. 헬라철학에서 로고스는 보편적인 법칙, 행위가 따라야 할 준칙, 이 법칙과 준칙을 인식하고 이를 따르는 분별과 이성(理性)을 뜻하며, 근원적 이론(이치)과 원리, 본질존재, 언어 등을 두루 포함한다. 신약성경에서는 헬라철학의 로고스사상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존재에 적용하였다.
  5. 계5:1~5. 여기에서 인을 뗀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역사에 적용하여 실행하기 위해 그 내용을 개봉하기 위한 행위이다. 그렇게 역사를 개봉한 이는 그 모든 역사를 책임지고 실행할 권한을 가진다. 그 권한을 행사하려면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자가 인을 떼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성취할 자가 떼어야만 한다. 그래서 역사의 승리자인 어린양 예수께서만 그 인을 떼실 자격이 있는 것이다.
  6. 원시적 종교 형태의 하나. 신령·악령(惡靈) 등의 초자연적 존재와의 교류를 통하여 인간의 부족한 면을 채울 수 있다고 믿는 신앙의 형태 오로지 신탁에 의한 주술·기도로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 신앙이나 행사. 샤머니즘(shamanism).
  7. 요3:13, 6:38, 16:28.
  8. 모든 역사와 그 역사 속에 있는 모든 존재들은 이미 신의 완벽한 계획 가운데 모든 시작과 과정과 끝이 이미 결정되어있다는 사상(생각)이다. 신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시기 때문에 모든 역사는 그렇게 결정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생각과 의지까지도 포함된다.
  9. 마16:24, 막8:34, 눅9:23, 마10:38, 눅9:24.
  10. 롬6:4~8, 갈2:20, 골2:11,12.
  11. 창6:1~3 –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계열로서 영의 사람들을 의미하고,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계열로서 육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지금도 마찬가지 이긴 하지만 고대사회에서 문화가 뒤섞이는 과정은 결혼을 통해 가장 손쉽게 일어났었다. 그 때문에 솔로몬의 정략결혼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12. 창4:12,
  13. 가인의 후예들은 하나님나라의 이방인으로써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소망이 없으므로 이 땅의 역사에 모든 것을 걸고 매달린다. 그래서 그들은 땅의 문화를 주도적으로 발전시키며 도시문명을 건설하는 역할에 전력을 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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