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元均)장군
----------------------------------------------
[1540년 음력 1월 5일~1597년 음력 7월 15일]
일 월 년
戊 戊 庚
戌 寅 子
54 44 34 24 14 4
甲 癸 壬 辛 庚 己
申 未 午 巳 辰 卯
태어난 날이 우수(雨水)를 지났으므로 월지 지장간 사령이 甲木이다. 고로 기본은 <칠살 편관격>사주다. 연간의 庚金 식신이 편관을 제살하여 좋아졌고, 寅중의 丙火 편인으로 통관하여 왈 <살인상생격(殺印相生格)>으로 격이 상격으로 구성되어졌다.
고로 무관(武官)으로서 고위직으로 출세할 사주가 된다.
사주로 풀이하여 보면 원균의 성격은 비겁한 인물은 아닌 것 같고 편관과 괴강살 때문에 성격이 다소 과격하고 급하였으리라 보여지며 연간의 식신 때문에 지나친 낙관론자로 전세를 잘못 읽었다 생각된다.
용장(勇將)으로서 육전에서는 적합한 장수지만 날씨, 해류(海流), 해안선 마다의 다른 깊이등의 조건등을 감안해야 하는 기교가 많이 필요한 해전(海戰)에는 부적합한 인물로 보여지며 그것이 원인이 되어 패장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그가 전사한 때 58세의 운을 보면 甲申대운에서 丁酉년 戊申월로 金이 강하여 사주의 격인 木과 용신인 火를 파괴하는 때이며 사망한 날짜는 甲辰일이라 일주 戊戌을 천충·지충(天冲·地冲) 시켜 흉하다.
그의 행적을 보면 辛巳대운 28세 丁卯년 무과에 2위로 급제, 선전관을 거쳐 조산만호(造山萬戶)로 있을 때 변방의 오랑캐를 무찌른 공으로 부령부사로 특진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종성으로 옮겨 병사 이일(李鎰)을 따라 시전부락(時錢部落)을 격파하는 데도 공을 세웠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癸未대운말 53세 1592년(壬辰)에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그 해 음력 4월 13일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전쟁 발발 초부터 조선군의 일방적인 패주의 연속이었다. 조선 수군 제일의 요충을 책임진 경상좌수영도 수사 이하 모든 장병이 도망가 싸워보지도 못한 채 완전 궤멸되었으며, 우수영 관할의 장병들도 거의 흩어져 휘하에는 약간의 병사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조정과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에게 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흩어진 군사를 수습해 고군분투하였다.
몇 차례에 걸친 원병 요청 끝에 마침내 이순신의 원병이 도착하자 합세해 옥포(玉浦)·당포(唐浦) 등지에서 연전연승하였다.
그러나 포상 과정에서 이순신과의 공로 다툼이 심해 불화가 발생하였다. 급기야 1593년 8월 이순신이 신설된 삼도수군통제사직에 임명되어 지휘권을 장악하자 크게 반발해 이듬해 12월 수군(水軍)을 떠나 육군 충청병사로 전출되었으며, 얼마 뒤에는 전라 좌병사로 전속되었다.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서울로 잡혀가 국문을 받게 되자 1597년 2월에 원균 나이 58세(丁酉)에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이순신을 대신해 삼도 수군을 통제하게 되었다.
그 후 여름 음력 7월에 삼도 수군을 모두 이끌고 부산의 적을 공격하던 중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대패하여 최후를 마쳤다.
그러나 후일 이순신이 민족의 영웅으로 각광을 받은 것과는 달리 대표적인 겁장이로 기록되어 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