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유구한 역사의 흐름을 통해서 스스로를 진화시키는 힘을 지녀왔다.
인간의 마음은 다양한 성향과 기질을 지니고 있고, 그 성향과 기질들은 성격을 이루고 이는 운명(運命)을 이루었다. 운명은 그가 해결해야 할 카르마이자 풀어야할 인연이며 성취해야할 미션이다.
인간이 세상에 드러내는 힘은 그의 거대한 야망과 대업(大業)에 의해 증건(證建)되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의 야망과 큰일을 성취함으로써 인간의 힘이 세상에 증명되었고 발현되었다는 것이다. 즉 문화와 문명을 통해서…
고대의 현자는 말한다. “문화와 문명은 그 자체로 인류의 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며 수많은 선현들의 미덕을 발산하고 있다고…”
하지만 21세기를 맞이한 우리들은 ‘해체(Disintegration )’라는 패러다임에 의해 모든 선한 미덕들의 에센스까지도 산산히 파편화되고 분열되어 버리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이는 융 박사가 말한 바와 같다. 이제 통합(Integration)의 시대가 펼쳐져야 한다. 시대의 흐름은 거대하게 해체의 극점에 다다르고 있다. 先天의 가르침과 암묵적 서열 및 위계는 현대를 작렬시킨 매스미디어의 거센 폭풍우와 바람에 휘청거리고 있다. 아니, 넘어지고 무너지고 더 이상 선천의 가르침에 들어있는 숭고미는 잊혀지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흡수되고 있는 듯 보인다.
고대의 가르침이 현대의 자유주의와 다문화세상 속에서 새롭게 옷을 갈아 입고 있다. 이제 후천의 다리를 넘어가는 고비에 있다.
모든 것이 ‘시대의 끝’을 명료하게 재확인시키기 위해서 우후죽순으로 부상하고 난립하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진리는 영원한 법!
아무리 혼탁한 세상이라도 운명과 심법의 묘용(妙用)은 오늘 지금도 신촌, 대학로, 강남, 홍대, 건대 지역 등에서 운세를 점치고 있는 젊은이들의 복잡하고 번잡한, 때로는 호기심 어린 마음을 위로해주고 씻어주고 만족시켜주고 있다.
운명은 미지의 세상에 다리를 놓는다.
희망의 비둘기는 이 다리를 넘어 생명의 여신을 향해 날아가 엘릭서(靈藥)를 물고 온다.
운명을 아는 이는 슬픔을 참고 기다리며 이 모든 슬픔이 감당해야 할 과정이라는 것을 안다.
희망이 비둘기가 영원의 생명수를 가지고 올 때를 기다리며…
그렇다. 이제는 힐링(Healing)의 시대가 온 것이다.
우리는 시대의 새벽을 열어야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다수 태동할 것이다.
힐링 패러다임은 이제 우주 시대를 열어가는 매개이자 초고도 문명으로 가는 익스프레스이다.
타로카드, 명리학, 점성술, 주역 등 모든 운세가 미래의 창문을 열고 우리가 힐링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방편인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작금의 21세기 초, 우리의 현실은 치유 받아야 할 영혼의 슬픔과 아우성 아니 함성과 절규로 가득하다.
성폭력, 황금만능시대, 정치노선의 혼란, 성과주의, 외모지상주의, 권력남용, 가정해체, 믿음과 신뢰가 깨지고 의리와 선의가 와해되고 있다.
좋고 나쁘고는 떠나서 혼돈과 혼란의 쉐도우는 거침없이 자신의 추미(醜美)를 드러내고 있다.
카운슬러이자 힐러인 우리는 비틀거리면서 이러한 혼돈의 여신 앞에서 무력하다. 그녀의 추한 아름다움은 금새 우리의 정신을 공격해 온다.
그러나 우리는 버텨낸다. 그녀는 단지 시간의 그물만을 지을 뿐 영혼의 그물을 짓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은 그녀에게 휘말릴 정도로 나약하지 않다.
물론 우리가 겪어야 할 이러한 과정이 있어야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황금시대의 새벽은 더욱 어둡기만 하다.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는 까만 밤을 달빛도 구름에 가리어 어두울 때, 골목길을 걷는 한 여인의 마음처럼… 우리는 조용히 새벽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힐링의 시대는 필요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며, 황금시대의 새벽열차에는 유능한 힐러들로 가득하리라…
상담사와 카운슬러 그리고 힐러는 모두 시대를 열고 개척하고 새로운 황금시대의 감로를 사람들에게 실어 나르는 빛의 사도이자 평화와 평등의 에반젤리스트이다.
복음전령사. 메신저. 메시아.
융 박사 말대로 모두 성령으로 감화된 21세기 시대의 영혼전사로 되살아난 우리가 해야 할 과제이자 소명인 것이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이 “세상을 보는 지혜”에서 설파한 것처럼 시대가 새로운 시대로 넘어갈수록 우리는 새로운 지혜를 더 많이 배워야 하고 더 많이 갈고 닦아야 한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때와 때아닌 것. 상황을 얼리거나 녹이는 법. 등등 복잡하고 다변화된 현시대에 우리는 어리석게 취급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잘 알고 사람들을 관찰하고 주시하고 관조해야 한다.
또한 아픔을 이기고 슬픔을 삼키지 않고서는 평화의 새벽은 열리지 못한다.
아니, 바로 지금이 평화의 순간이자 평등의 시대이다.
깨어있는 자에게는…
결국 ‘깨어있음’의 자리를 잃지 않는 것이 21세기 카운슬러이자 포춘텔러이면서 힐러인 우리가 해야할 숙제이자 과업이다.
고객의 마음과 정신이 힐링이 되지 않고서는 미래는 막연한 비전의 제시가 될 수 있다.
카운슬러가 힘을 다해 고객에게 치유의 확신을 줄 때
카운슬러는 카르마 전도라는 거대한 두려움을 넘어서 고객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의 빛을 전달 할 수 있는 것이다.
카운슬러가 받는 카르마보다 고객의 마음을 바로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할 수가 있다. 새벽은 고통없이 오지 않으며 누군가의 마음을 열고 미래를 보여준다는 것에는 그만큼 희생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우주적 거래의 법을 무시해서는 안되는 법. 따라서 지혜는 더 큰 지혜로 거듭나야 한다. 그러므로 카운슬러는 매사 겸허해야 한다.
용기와 지혜를 겸비한 카운슬러가 되기 위해서는 늘 멈추지 않는 열차처럼 매진해야 한다. 그 어떤 장애물이라도 우리는 극복할 수 있다는 힘을 가져야 한다. 나폴레옹이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라고 한 것은 나폴레옹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카운슬러는 고객 누구나가 나폴레옹처럼 자신의 삶에 확신과 굳건한 의지를 갖도록 용기를 심어주어야 한다.
눈 속에서 비장한 각오를 하고 고통스러워 했던 혜가에게 달마 대사가 해준 말처럼…
고객에게 ‘당신의 마음에는 불안이란 없다’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변화해야 한다.
힐러가 바뀌지 않고서는 힐링을 받으러 온 고객을 변화시킬 수 없다.
진리를 갖춘 사람만이 진리를 전해줄 수 있다.
물론 모든 고객과 인연들은 힐러인 우리들의 문제를 지적해주고 알려주는 소울 메이트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늘 깨달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삶 속에 그들의 모습 속에 그들의 마음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테아르드 샤르뎅 신부가 언급한 것처럼, 인류가 큰얼을 이루어 오메가 포인트의 완성을 향할 때 우리는 코스모폴리턴의 의미를 알게 된다. 전 인류의 질병이 완전히 진단하기 위해서 우리는 ‘해체(Disintegration)’의 역사를 경험해야 했다.
이제 진단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바야흐로 치유의 시대가 올 것이다.
나는 미르치아 엘리아데가 <이미지와 상징>에서 말한 것을 “인류의 건강함은 인류의 문화와 문명의 다양성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말로 패러프레이즈해 본다.
어느 고대 선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새벽은 밝아와도 아직 눈을 뜨지 않는 새들이 많을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새벽이 비록 밝아와도 잠자는 새는 먹이를 구하지 못할 것이다.”
노력하는 자만이, 부지런한 자만이 황금시대의 새벽 열매를 딸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대세는 운세와 힐링 그리고 문화와 문명의 에벤젤리스트들이 될 것이다.
문화와 문명의 곪음을 치유할 수 있는 힐러가 필요하다.
운세에만 의존하면 맹목적 예언술이 되며,
심리치유 자체에만 의존하면 비현실적인 치유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性命雙修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선천의 性과 후천의 命이 만나 마음공부와 운명공부가 하나로 되어야 힐링(Healing)의 시대를 열어 갈 수 있는 것이리라...
석양이 지고 있다.
이제 내일 강의 준비를 위해 또 자료정리를 해야겠다.
오늘도 마음은 황금시대의 눈부신 햇살 속을 거닌다.
피크닉 배상